언제나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

동산만 가지고 살아보고 싶어서

by 혜리
그냥, 결혼이 부동산으로 유지되는 거란 생각을 했어. 도무지 감당이 안되는 금액의 집을 사고, 같이 갚으면서 유지되었을 뿐인 게 아닐까. 그래서 한동안 동산만 가지고 살아보고 싶어서.

정세랑, 「이혼 세일」, 『옥상에서 만나요』, 창비, 2018, 222쪽


아가씨 집에는 왜 이렇게 뭐가 없어요?


지난 주, 보일러 점검 때문에 자취방에 들어온 집주인이 놀라 한 말이다. 문을 열어놔서 찬 기운이 들어왔고 왠지 방이 더 비어 보였다. 아가씬 여기 오래 안 살 것 같아. 그 말에 답하지 못했다. 내 눈에는 너무 많고, 남의 눈에는 너무 적은 살림살이. 내 힘으로 이고 질 수 있을 정도의 사물만 남기고 싶다. 동산만 가지고 살아보고 싶다.


언제나 옷장 위로 쌓인 종이박스를 보며 걱정했다. 내가 죽거나 멀리 떠나면 내 물건들은 어떻게 될까. 내 정보가 듬뿍 담긴 A4용지와 노트들은 어쩌지. 소각장이 있으면 좋을 텐데, 아니면 파쇄기라도. 노트는 스프링을 빼고 책등을 찢어 해체하고 클리어파일은 속지를 일일이 비닐에서 빼내 손으로 잘게 찢어야 한다. 언젠가는 해버려야 할 텐데. 맥락 없이 그런 걱정을 하는 날이 많았다.

자취 첫날, 집에 덩그러니 앉아 생각했다. 이것들을 두고 어떻게 떠나야 하나. 버려야 하나, 다시 본가로 옮겨 놔야 하나. 집을 어디에도 내려놓지 못하는 달팽이가 된 기분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덜컥 이 짐을 내 등 위에 올려놓겠다고 했을까. 최소한 계약 기간 동안은 이 생활을 청산할 수 없다.

안정적인 삶은 부동산으로 유지된다. 그런데 부동산 역시 안정적인 삶으로 유지되는 거 아닌가. 집세를 내려면 정기적인 수입이 필요하고, 그러자면 결국 직장을 구하게 된다. 안정적인 직장과 집이 있으면 크고 무겁고 좋은 물건도 살 수 있게 된다. 부동산은 증식한다. 삶이 둥둥 떠서 날아가지 않게 하는 누름돌이 된다. 아직은 그 순환에 너무 깊이 발을 들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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