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또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읽다 보면 깨닫는 사실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눈부신 민주주의를 꽃피웠던 지적인 인간들, 그들의 지적인 삶은 실상은 누군가를 착취하는 노예제 위에서만 가능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노동이나 성실은 비천한 노예의 특질이었으며, 모멸적인 말이었다. 성실하다는 말은 그 때는 욕이었다!
덕분에 나는 성실하게 회사를 다니는 삶을 거부하고 싶어 했다는 죄책감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관조적 삶을 당장 바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그 관조적 삶이 누군가에게 삶의 노동을 일임하는 착취로만 가능하다면, 나는 그런 삶에 동의할 수 없다.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없다. 그러니까 나는 제3의 삶을 끈덕지게 찾아내야 하는 운명이다.
12월로 계획했던 퇴사를 미루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부모님이 더 이상 일하지 못하고, 동생이 직업훈련원을 졸업하는, 내가 모두의 삶을 조금씩 도와야 하는 시점이 분명히 곧 올 거다. 그 시점이 오면 나는 정말 퇴사하고 싶어도 그만두지 못하게 될 텐데.
모든 것이 일 년도 되지 않는 시간 안에 급변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내가 두려워하는 그 시기가 오기까지 길어봤자 이삼 년일까. 그 전에 나는 이직을 성공할 수 있을까. 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내 재능.. 그런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원하는 종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자기 혼자 양보했다가는 나중에 모두를 원망하는 그런 사람이 정말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 스스로 희생하며 살 마음도 아직 들지 않는다. 이런 마음으로, 이토록 철없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여전히 글을 쓰고 싶다. 부끄럽다. 나는 이 보잘것없는 글로 얼마나 나만을 위로하고 나만을 합리화할 것인가.
퇴사를 미루는 순간 세상이 끝날 것처럼 구는 나를 매 순간 발견한다. 내 삶을 여기서 포기하는 느낌이라서.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이대로 포기하는 느낌이라서. 스스로 그토록 굳건하게 다짐을 했는데, 그걸 이렇게 저버릴 수 있다니 나에게 배신감이 든다. 내 결심은 그렇게 우스운 게 아니었어.
하지만 그걸 깰 만큼, 그때 꿈꿨던 삶을 포기할 만큼, 지금의 내가 바라는 것도 있는 거야, 이것도 나름대로 나의 용기인 거야, 여기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어, 너를 어디 어두운 구멍 안에 파묻는 선택이 아니야, 위로를 해 봐도 쉽지 않다. 마음을 벅벅 긁는 느낌, 아프다.
S선배는 나에게, 그렇게 젊은데 왜 뭘 못 할까 봐 그렇게 초조해하냐고 했다. 젊으니까 초조해하는 거다. 정말 그 말이 맞을까. 나는 1년간의 백수 기간 동안 그랬던 것처럼, 괜히 별 것 아닌 것이 평생 이어질까봐 고민하고 있는 걸까.
낙천주의자라는 이름의 카페에 앉아 매번 혼자 눈물을 흘리다 간다. 낙천주의자라는 카페에서 항상 비관주의자가 깨어난다. 그래도 카페의 이름이 낙천주의자라서 다행이다.
이를 악물고 쓴다. 나는 절대 나를 잊지 않을 거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절대 잊지 않을 거다. 생활이 나를 휩쓸어 마모시키게 두지 않을 거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잊게 두지 않을 거다. 절대로. 앞으로의 시간 동안, 아무리 느리더라도 내 것을 할 거다.
사고를 날카롭게 가다듬고, 내가 궁금한 것을 찾아 읽고, 듣고, 생각할 거다. 일하다 지치고 피곤해서 그 전에 어디까지 작업하고 생각했는지 잊더라도 부득부득 처음부터라도 다시 할 거다. 붙들고 놓지 않을 거다. 나는 쓰는 사람이다. 생활하며 쓰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