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리 May 05. 2019

나는 누구인가

하드코어 라이터 프로젝트(2)

한 동안 내가 물 같다는 느낌에 시달렸다. 미지근하고 소독약 냄새가 희미하게 나는, 아무 특징도 형체도 매력적일 것도 위험할 것도 없는 물. 유리 용기에 담겨 빛날 일 없이, 누군가의 목구멍으로 들어가 갈증을 해소하거나 수도꼭지에서 힘차게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가 될 일도 없이, 싱크대에 고여 말라가는 그런 물.


아주 오랫동안 나는 언젠가 작가가 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새롭고 유익한 것을 생각해내, 글과 말만으로 업적을 세울 사람이라고. 기자를 꿈꿀 때까지만 해도 그 상상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행정사무직으로 살아온 지 2년 5개월 차, 나는 내 오랜 믿음에 실체가 없다는 걸 알았다. 글쓰기를 삶의 우선순위로 두지 못한 시간이 너무 길어져 있었다. 더 이상 내가 쓴 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눈 씻고 찾아봐도 그 글자 더미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내가 작가라는 믿음에는 어떤 근거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내 형태를 유지하던 틀이 깨져 뭔가가 첨벙, 풀썩 하고 바닥으로 쏟아졌다. 딱히 무엇을 새로 만들어내지 않고 이대로 평생 불평하다 죽어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딱히 무엇을 만들어내려 애쓰거나 세계일주를 떠나거나 퇴사를 해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생후 25년 6개월, 신장 160센티미터의 아시아인 여성, 나는 누구인가. 아무도 아닌 것은 아니다. 다만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엔 작가가 되기 위해 태어났기에 어떤 일을 하든 운명적으로 작가의 삶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사람은 없다. 그저 사는 대로 살게 될 뿐이다. 그 자체는 분명히 비극이 아니지만, 허영을 버리지 못한 사람에게는 비극이다. 스스로가 맹물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안 사람에게 세상은 물때 낀 싱크대 같은 법.


너 그렇게 진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왠지 공감 가.


글을 잘 쓰지 못한다면 살 이유가 없었다. 죽을 순 없으니까 써야 했다. 잘 써야 했다. 당분간의 목표를 오로지 ‘마음에 드는 글’을 쓰는 것으로 삼았다. 모호한 표현이었으나 지금 내게 가장 정확한 과녁이기도 했다. 퇴근 후 식탁에 앉아 엉망인 문장들을 써냈다. 그 문장들은 대체로 배설이었고, 그중 한두 문장만이 나쁘지 않았다. 그 상황을 견뎌야 언젠가는 글 쓰는 감각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어야 했다. 나쁜 글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일 나쁜 글을 쌓아나갔다. 절망하는 나와 다독이는 내가 병존했다.


좋은 글을 위해 수업과 모임을 늘리기 시작했다. 에코페미니즘 수업도 그중 하나였다. 에코페미니즘 첫 강의에서, 나는 내 정체성의 작은 조각을 찾았다.


자본주의 사회는 욕망이 오로지 돈인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가정합니다. 사람들의 욕망은 원래 그렇게 다 똑같지 않았어요. 하지만 요즘은 점점 모두가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되어 가고 있죠. 아이들의 꿈이 건물주인 세상이요.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아닌 사람.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사람. 삶의 목표가 다른 것도 아닌 그저 ‘부자’인 친구를 보며 의아해했던 사람. ‘돈이 최고다’라는 선배의 말에 원인 모를 불만을 삼켜야 했던 사람. 내가 무엇도 아닌 맹물 같은 존재라는 자괴감이 깨졌다. 나에게는 돈이 아닌 다른 가치를 당연하게 추구해 왔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렇구나, 나는 옛날 사람이네. 수업 자료 귀퉁이에 그렇게 적어 넣었다. 흐늘거리던 영혼이 잠시나마 자리 잡는 것을 느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을 세 글자로 줄이면 정체성이고 두 글자로 줄이면 철학, 한 글자로 줄이면 삶이다. 인간은 그저 먹고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종족이다. 의미를 부여해야 직성이 풀리는 종특은 나를 이렇게 살아가게도 하지만 때로는 너무 힘들다.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정체성을 갖고 싶다는 욕망마저도 나의 특징이다. 나는 누구인가. 그런 질문을 한다는 자체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이 된다. 나는 질문하며 고민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매거진의 이전글 하드코어 라이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