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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찌네형 Jul 30. 2020

(#1) 라떼는 말이야......

1990년도 후반 군대생활

'너, 근데 왜 갑자기 뛴 거야?'


지금은 없어진 306 보충대로 입소하는 날이었다.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강당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뒤를 돌아보며, 아직도 손을 흔들고 있는 가족들을 바라보고, 이젠 그만 들어가라고 손짓을 하는 찰나, 옆쪽으로 길게 줄 서있는 군인들이 굉장히 낮은 목소리로 하나같이 욕설을 하기 시작한다.   


"야, 이 새끼야. 안 뛰어?"

이 말에 뛴 거였다. 그 뒤의 심한 욕설은 쓰지 못하겠다. 군인들은 빨간색 PK셔츠에 특유의 팔각모를 꾹 눌러쓰고 미동 없이 입만 조곤조곤 얘기하고 있던 터라, 그 말이 가족들에게 들릴 리 없었을 것이다.


강당에 들어가니, 여기저기서 고성에 욕설에, 실로 난장판이 아니었다.

"야. 이 새끼들아 엎드려. 고개 숙여. 여기 놀러 왔어?" 상당히 어리둥절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러분의 귀한 아들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직 가족, 친구, 애인과의 작별이 못내 아쉬운 이들에게, 그들의 말 하나하나는 너무도 가혹했었다.


나는 97년에 군에 입대했다. 당시의 군생활은 26개월이다. 군입대 관련 노래라면, 더 옛날 노래지만 김민우의 ‘입영열차 안에서’를 많이 들으면서,  [그래, 저때는 3년이었지. 나는 그래도 2년 2개월이니 많이 단축됐는구나..]하고 위안을 삼았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18개월이라고 하니, 격세지감을 새삼 느낀다.


그렇게 306 보충대의 3박 4일 생활이 시작되었다. 여기저기서 온, 까까머리의 청년들. 뭔가에 항상 긴장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 역력했으며, 당장이라도 이곳을 탈출하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었다. 혹자는 정신병자처럼 행동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이 있다고 알려주기까지 했다. 잠은 올리 없고, 여기저기 [꿈의 17사. 17사 땡보직]이라는 출처모를 낙서가 수두룩 했던 기억이 있다.


군대에 있을 때, 딱 한번 울었던 거 같은데, 그때가 306 보충대 3일차 때 헌혈한 후였다. 자원봉사하는 아줌마가 오렌지쥬스와 초코파이를 주고 있었다. 나도 헌혈을 마치고 아줌마한테 가서 먹을걸 받아 가는데, 아줌마가 초코파이 하나를 바지에 더 챙겨주시는 거다. 이때의 복잡 미묘한 감정, 그 며칠간의 강압적인 생활에서의 울분 같은 게 한 번에 터져 나왔다. 화장실에 들어가 얼마나 울었나 모르겠다.




그렇게 신병교육대에 갔다.

나는 여름 군번이었기에, 너무나 더웠던 기억만 있다. 훈련 후에도 감염예방 차원에서 뜨거운 물을 줘서, 시원한 콜라 한잔을 갈구하던 것이 생각난다. 담장 밖으로 지나가는 버스를 보고 환호했던 기억이라던지, 사단장 온다고, 아스팔트를 걸레로 닦았던 기억은 생생하다. 훈련으로 제일 힘든 건 PRI였다. 흙바닥에서 하니, 여기저기 너무 아팠다.


초반에 나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95년에 있던 가족의 슬픈 일로 인해, 그 당시까지도 부모님은 많이 힘들어하고 있던 그런 시기였기에, 난 항상 집이 걱정되었다.

한 번은 천주교 행사를 갔는데, 앞에서 좋은 말을 해주던 신교대 조교가 있었다. 목소리도 나긋나긋, 앞으로의 군생활에 도움이 많이 될 듯했고,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도 필시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됐다. 그래서 하루는 면담을 신청하려고 갔는데, 그때 마주친 그는 완전 딴판이었다. 어찌나 욕을 찰지게 잘하는지, 가까이 가서 말을 걸 수 없어 발길을 돌렸다.




당시, 나는 컴퓨터를 나름 잘 다뤘다. 지금의 한컴이 당시에는 아래아한글이라고 불리었는데, 그 프로그램을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들이 흔치 않았다. 특히, 자판을 빨리 치던 나를, 다들 "우와~ 대단하다"라고 보던 시기이다. 참고로 그때 인터넷이란건 없었다.


그래서, 신교대 조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나에게 가르쳐달라는 사람도 많았고, 그로인해 나름 특혜를 받았었다. 남들 개인 정비할 때 사무실로 불려 가 컴퓨터를 가르쳐주면서 콜라나 과자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 때문에 나중에 특급 병사도 따놓은 당상이었지만, 사격 20발에서 8발만 맞추는 바람에, 전체 134명에서 29등을 했다. 아직도 기억하는 걸 보면, 얼마나 아쉬워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시에는 신교대 퇴소식에 가족들이 왔었는데, 퇴소식 후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닭장차(?)에 실려 각 부대로 보내진다. 다만 특급병사는 그 길로 4박5일 휴가를 갈 수 있었으니, 얼마나 큰 혜택인가......




나는 사단 군악대로 착출 됐다. 지금 생각하면 오합지졸이었지만, 나름 사회에서 놀던 친구들도 있었고, 홍대에서 공연하던 친구들, 버클리 음대에서 플루트를 전공하던 아이까지 다양하게 들어왔다.


합주실에는 개가 있었다. 이름은 하프였고, 당시 12살 정도였다. 하얀색 바탕에 검은색 얼룩인지, 아니면 그 반댄지 모르지만, 영특했다. 무엇보다 영특했던 건, 야간근무를 갈 때 꼭 합주실을 지나는데, 항상 그 합주실 언덕 어귀에 우리를 기다리고 근무지까지 같이 갔다 왔다. 어떻게 그 시간을 알았을까, 지금 생각해봐도 신기하다.


어느날 병적으로 조심성 많던 신임 음악대장(대위)이 개가 목줄 없이 돌아다니니, 목줄을 채우라고 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한건지, 야구경기 때도 야구공이 아닌 테니스공으로 하라고 할 정도였다. 평생 목줄을 해본 적 없는 하프는 너무 힘들어했고, 목줄을 한채 울타리를 넘다가 그대로 목이 졸렸다. 나는 경직된 몸의 하프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 줬다.



군악대이기에, 사단과 군단의 누구누구 결혼식에 자주 브라스밴드로 불려 가곤 했다. 물론 돈 받고 하는 건 아니다. 뭐, 혹시 애들 밥이라도 사주라 하사관들에게 돈을 찔러줬는지 모르지만, 그게 우리에게 돌아왔는지는 의문이다. 다 그런거다. 여긴 군대아닌가.


한 번은 군수 대대장(중령)의 딸 결혼식에 갔었는데, 갔다 오니 신라면 박스가 산떠미처럼 쌓여있는 거다. 그날 이후로 매달 신라면이 풍족히 제공되었다. 원래 부대 내 허락되지 않는 곳에서 불을 피우면 안 되지만, 주말 합주실에 올라, 4명에서 한 박스 거덜 낸 적도 있었다. 면만 넣고 계속 끓이니, 국물이 걸쭉해졌던 기억과, 식판에 밥을 많이 받아놔, 찬밥을 말아먹은 기억이 너무 생생하다.




내가 야간보초를 서던 곳은 사단 후문이었다. 후문으로 나가면, 사단 가족들의 관사가 나온다. 항상 오가는 차량은 번호를 기억해서, 굳이 누구냐고 물어보지 않고, 경례한 후문을 열어주곤 한다.


한 번은 새벽에 근무교대를 한지 얼마 안돼, 공병 야단에서 출장 온 간부가 병사 4명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원래는 열어주면 안 되는데, 우리 사단 소속도 아니고, 간부가 같이 있어 문을 열어 줬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오후에 헌병대가 합주실로 왔다. 그때 나간 간부와 병사 4명이 교통사고로 모두 사망했다는 거다. 때문에 진술서가 필요했다고 한다. 나는 뭔가 나한테 잘못된 게 있지 않을까 섬뜻했지만, 내가 쓴 진술서를 받아 든 헌병대 간부가, "그래. 네가 제일 잘 썼다. 이 정도면 됐다"하고 가지고 갔다. 그리고 나에겐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군악대에 있다 보면, 군에서 사고사 한 군인들을 위해 영결식장에 나팔수로 가는 일이 있다. 적어도 1년에 3~4번은 있었다. 우리가 담당하는 지역의 군단과 사단의 경우가 그러하니, 실제로 군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까 한다. 한 번은 축구하다가 공에 심장 부근을 맞아심정지로 사망한 적도 있었다. 군생활내내 마음이 찝찝했고, 안쓰러웠다.


또, 자살사건이 많았다. 내가 근무할 때도 우리 부대에서만 한 번은 내무반에서, 한 번은 사단 사령부 옆에서, 또 한 번은 산에서 자살을 했다. 뭔가 다들 이유는 있었겠지만, 군에서 자살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취급을 받는다. 군생활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기에, 잘 참고 견디는 것이 중요한데, 이 역시 안타까움으로 남아 있다.


지금도 가는지 모르지만, 신교대시절에 교육차 방문한 곳에서 자살한 병사들의 사진들을 여과없이 본적이 있다. 기억에서 쉽사리 사라지질 않는다.

 



군악대는 여러 행사에 많이 나간다. 제일 힘든 건 군단장 이취임식으로 기억한다. 여기에는 각종 별들이 오는데, 군단장은 3 스타이다. 3 스타의 이취임식이니, 4 스타인 군사령관도 온다.


별들에게 경례할 때는 스타 마치라고 별의 숫자만큼 팡파르가 있다. "빰빠라 빰빰 빰빰 빠빠~ 챙~"이 걸 4 스타는 4번을 해야 한다. 그다음에 "빠라빠라 빰~~~"으로 경례 노래가 흘러가니, 경례도 길다. 긴장도 되고, 별들도 많이 오고, 헬기 떠다니고...... 이게 여름이면 덥고 땀나고, 겨울이면 춥다. 다른 인원들과 달리, 우린 움직이지도 않고 계속 서있는데,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건, 겨울에 악기가 침에 얼지 않게 계속 움직여 줘야 할 경우이다. GP에 사람들 들어가고 나올때도 불어주는데, 이때는 악기가 거의 얼어서 잘 안 움직인다. 소위 삑사리가 많이 난다. 잘못하면, 트럼펫의 경우, 입술이 마우스피스에 붙는다.

 



20대 초반이면, 정말 혈기왕성할 때이며, 성적으로도 그렇다. 그래서 부대 주변에는 그렇고 그런 곳이 많다. 내가 있었던 부대 근처에도 용주골이라고 유명한 곳이 있었고, 주요 고객이 군인들이었다. 주말에 외박을 하면, 몇몇 아이들이 무리 지어 찾아가곤 했는데, 군에서도 적극적으로 막지 않는 분위기도 있었다. 헌병 풀어서 주변 뒤지면 거진 다 붙잡히지 않을까 했지만, 그런 경우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언젠가 군 위문공연이 왔다. TV 카메라 오고, 트로트 가수등 연예인도 와서 노래 부르고 했었다. 유명한 사람들은 아니였던지라, 나는 별로 재미가 없었다. 공연이 끝나고 일어나려는 찰나, 선임하사가 "어디가? 이제부터가 진짜야." 하는 거다. 그런 공연은 통상 1부, 2부가 있어서, 1부는 공식행사로 끝나고, 2부는 스트립쇼 같은 공연을 한다. 아직도 당시의 그 장면은 충격으로 남아있다.




먹는 건 참 잘 먹었다. 군대에 아들 보내는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부실하게 먹지 않을까 걱정할지 모르지만, 그런 고민은 접어두어도 된다. 정말 잘 나온다. 나때도 그랬는데, 지금은 얼마나 잘 나올까.


신병교육대에 온 첫날, 전투식량을 처음 먹어봤다. 다들 그 뭔가 퍽퍽한 느낌에 쌀도 다 익지 않은 듯한 것에 익숙하지 않을 듯, 많이 남겨서 혼났던 기억이 있다. 나도 다 먹지 못했다. 그러나 상병쯤 되면, 말이 달라진다. 전투식량이 나오는 날이면, 처음에는 군복, 다음에는 깔깔이, 다음에는 반바지, 다음에는 야상 입고, 각기 모습을 달리해 최대한 많이 받아 쟁여 놓는다. 전투식량은 정말 맛있는 음식이다.


한 번은 제주도에서 귤 파동이 있었다. 그 기사가 난 다음 주부터 매주 부대로 귤이 배달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먹다 먹다 지쳐서, 우유에도 말아먹어보고, 즙을 내서 음료수로도 만들어 먹었다. 그래도 매주 쌓이는 귤 박스를 처리하지 못하고,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다고 선임하사에게 혼났던 기억이 있다.


언젠가 식사메뉴로 닭요리가 많아지거나, 돼지고기가 많아지면, 한 번쯤 의심한다. 밖에서 역병이 도나.........


또 한 번은 너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어서 그렇지만, 김치를 주는데, 김장봉투채로 가지고 와서, 그 안에서 떠서 배급을 해주고 있었다. 내 대각선에는 중위가 앉아서 밥을 먹고 있었는데, 그 뒤쪽에서 김치를 배급하던 병사가, '이게 뭐야?'하고 놀래더니, 김장봉투 안에서 김치국물에 범벅된 죽은 쥐 한 마리를 꺼낸다. 그걸 본 중위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엄청나게 쌍욕을 퍼 붇는 거다. 바로 앞에서 그걸 듣고 있자니 너무 충격이었는데, 나도 참기 힘들었지만, 꾸역꾸역 먹었던 기억이 있다. 당시 내 짬에는 음식을 남기면 선임병들에게 혼났다.


군대리아는 나 때도 있던 말이였는데, 지금도 있는걸 보니, 구전설화의 힘은 대단하다고 본다. 군대리아인지, 군데리아인지,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다.


PX는 예나지금이나 사병들의 안식처이다. 전자레인지에 돌려먹는 닭갈비와 만두는 정말 최고였다. 개인적으로 좋아한 건, 작은 꽃 문양의 약과였다. 건빵주머니에 넣어, 두고두고 먹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월급이 많아, 좋을지 모르지만, 당시에 내 월급이 1~2만 원 정도였다. 다행히 부대 내 우체국이 있어서 통장을 만들어, 집에서 필요한 돈을 송금받았었다. 불법이지 않나 했지만, 뭐.. 특별한 일은 생기지 않았다.




군생활은 누구에게나 힘들다. 18개월간 자유를 억압하고 박탈하는 것이기에 쉽지 않다. 하지만, 피할 수 없기에 미루지말고, 요령 피우지 말고 때 맞춰서 잘 이행하라고 조언하고자 한다.

그리고, 할만하다. 재미있기도 하다. 생각만 잘 하면, 그 시간이 결코 무의미하진 않을 것이다. 좋은 부대원을 만나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겠지만, 그건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니니, 운에 맡기는 수 밖에 없다. 그냥 나는 묵묵히 내 할일을 잘 하면 되고, 부당한 것은 부대에 신고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면 된다.


소령으로 있는 대학후배는 [엄마들한테 걸려오는 컴플레인에 죽겠어요. 애들한테도 뭐라고 못해요. 이게 군댄가 해요]라고 하소연을 한다. 감기걸린아이를 혹한기 훈련에 참가시켰다고, 엄마가 소송한다고 매일 전화가 온다면서 내게 그 얘기를 들려주는데, 뭐라 할말이 없었다.


그 18개월의 시간이 정말 안갈것 같지만, 나는 26개월을 포함, 이미 20년이 지났다. 정말 군대에서 시간이 안간다면, 나는 무급으로 일할 수 있다. 그러니 너무 겁먹지 말자.  


그리고 나는, 내가 군대에 있을때, 제일 건강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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