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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찌네형 Jul 23. 2020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작지만, 작지않은 것에서 느끼는 아름다움

지난밤의 피로가 채 가시기도 전에, 창가에서 들어오는 이른아침 설익은 빛이 어김없이 깨운다. 마치 매일매일이 똑같은 일상의 반복인듯, 내 기억속에 오늘는, 어제 그 시간 그 장면과 다르지 않다. '그래 옛날에 이런 영화가 있었지. 매일 매일이 똑같은......별거 아니였구나. 그냥 내가 그렇게 사는구나'. 이내 뭔지 모를 씁쓸한 표정을 짓으며 몸을 움직여 본다. 


그냥 눈을 비비고 도통 움직여지지 않는 몸뚱아리를 베베꼬며 일어나려고 노력한다. 한때 유행하던 아침형인간이 되어보겠다 다짐했던 약속은 어디로 갔는지, 아침 공복상태의 운동이 다이어트에 좋다던, 그래서 나도 할 수 있을거라던 강한 믿음으로 도전했던 지난날의 다짐은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먼 얘기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게으름을 말하기 이전에, 내 나이 40살에 진정한 나를 찾는 것은 사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나를 찾기전에, 내 주변을 챙겨야 했고, 뭔지 모를 책임감은 매순간 나를 엄습해 온다. 내가 버는 돈은 나의 것이 아니며, 나의 시간은 나의 것이 아니였고,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자동차 조차도 가족들을 위한 차를 사야하는 내 주변에 온전히 내것이라는 것은 없는, 너무 그렇게 나를 잊어버리고 사는건 아닌지 한다. 그렇게 내 주면의 모든것과 타협하며 합리화시키며, 꾸역꾸역 살아 온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너무 불쌍해진다.

나에게도 항상 마음속에 새겨놓은 세계무전여행이라는 꿈이 지워지지 않았고, 주말 한나절에 몰디브는 까지는 아니지만, 동네 카페에서 모히또 한잔 마시며, 다분히 철학적인 니체의 책한권 음미하고 싶은 낭만적인 소망이 있다. 뭐, 거기까진 아닐지 모르지만, 나도 오롯이 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똥찬 아이디어 하나 없을까 매번 생각하지만, 점점 내 몸뚱이는 말을 듣지 않고, 소파를 애인삼아, TV 리모컨을 벗으로, 몸이 아닌 눈으로만 세상을 마주하려 하는건 아닌가 한다.


그렇게 점점 나를 잃어간다.

다들 그렇게 산다고 생각했다. 인생 뭐 특별한거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우리는 다 그런것 아니겠는가. 절대불변의 진리를 찾는 일 따위에 시간을 들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애써 외면한다. 아무 의미 없었다. 그 전에 내 앞에 놓인 이 산재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도, 매일 매일이 버거워 나는 토해내기 일쑤였다.


시간은 그렇게 정처없이 흘러갔다.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 짧은 찰라의 시간에 나는 이미 40대 중반을 향해가고 있었다. 40대 초입에 들어오면서, 최대한 시간을 놓치지 않고 붙들겠다고, 1분1분을 꼭꼭 씹어 삼키겠다고 다짐했었다. 어리석은 행동이였다. 잡는다고 잡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당연한 이치를 알아 차리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마음을 다잡는다. 잡은 끈을 놓치면, 다시 잡으려고 했다. 그래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좀 더 의미있는 것을 찾아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있는 것들이 모이면, 적어도 내 무덤앞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은 것으로 말미암아, 많은 후회는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금씩 나의 삶에 있어 변화를 꾀하고 있던게 아니었을까. 버거운 몸부림일지 모르지만, 내 마음을 조금씩 일으켜보려고 발버둥쳤다.


어느 시대에나 40대는 낀세대였다. 그리고, 인생에서 제일 바쁘면서도 가장 부담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가 어느덧 돌아보면, 40대 중반에 와있고, 잠시 시간을 놓치면 50대에 가까워지는 실로 마법과도 같은 시간이 아닐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항상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회사에서는 위아래사람들에게 치이며, 매번 회사의 모든 문제를 떠앉고 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으며, 집에서 조차도 마음편히 쉬지 못하고 아빠라는 이름의 말못할 책임감에 눌려 살아야 하는, 그런 아름답지 못하고 끼고 눌린 세대.


다만, 생각을 조금만 정리하면 그런 낀세대도, 낀세대 나름의 재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윗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조금의 지혜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아랫사람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시작으로 신세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비록 몸은 버텨주지 않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나와 나의시간을 어떻게 하면, 가장 찬란하고 아름답게 사용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생각의 전환도, 혹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에게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베란다 화단에 이름모를 녹색 생명체가 피었다. 잎파리 하나 핀게 무슨 대수인가 생각하겠지만, 이젠 그 잎이 다르게 보인다. 그 작은꼬마가 사는 곳은,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지만 내가 한라봉을 먹고 무심코 그 씨를 뱉어 논 곳이기 때문이다. 그저 아무의미 없이 내뱉은 나의 행동이 작은 생명을 피웠다는 것에 순간의 전율이 있었다. 저 꼬마는 저렇게 태어나, 잎사귀를 펼치려 노력했구나, 너도 소중한 생명이구나......하고 말이다. 이런 생각이 과연 젋었을때 가능했을까 생각해보지만, 그때는 그저 나의 시간을 즐기기 바빴지, 내 주변을 바라보진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이런 작은 것에는 전혀 관심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냥, 그런거라고 생각했지,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처음에 뭔지몰라 포털사이트에 물어보니, 운향과 나무란다. 한라봉이였다.

그 화단 옆에 거미줄이 규칙적인 8각형의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화단에 물을 주면, 작은 이슬이 맺혀있어, 나름 오묘하면서도 예쁘다. 그것보다 그 8각형에 집을 지은 집주인도 행여나 집이 망가지지 않을까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재미있다. 내가 언제 이런 작은 것들을 보면서, 그런 재미를 얻었단 말인가.


생각해보니, 내가 대학생때, 언젠가 엄마와 놀러간 서울대공원에서, 그때 엄마는 연신 꽃을 핸드폰으로 찍으면서 예쁘다, 예쁘다 하고 있었다. 나는 그 꽃이 예쁘긴 했지만, 사진으로 찍을 만큼의 매력을 느끼진 못했다. 그 위로 날라다니는 나비를 보고도 예쁘다하는 엄마의 그말이, 지금이되서야 왠지 이해가 되고 마음에 와 닿는다. 그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것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언가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런 상황을 이해하는 때가 있는것 같다. 나는 지금, 40대의 때를 지나고 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나이가 되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새로움의 재미를 알아가고 있었다. 뭔가 장황한 계획이나, 버킷리스트 같은 목표를 실천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소소한 것에서의 재미를 느끼는 것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것들이 소중하다는 것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나를 깨우치는 인생의 진리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철저하게 나만 재밌는 것을 가지고자 한다. 누가 재밌어 해주겠지와 같은 공감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살아오면서 너무 많이 '다른 눈'을 의식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것에 많이 지쳐있으면서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나보단 주변눈치를 살피는 것에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이 정도 살아왔으면, 이젠 온전히 나만 즐기고 나만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고 있지만 정말 온전히 내가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인 척하고 살고 있진 않은지 말이다. 그래서 힘들어하고 슬퍼하며 아파했던 지난날이 있었다. 원래의 나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뭔가 거창함이 나를 꾸며줄 것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꿈도 커야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져야 했고, 좋은 차에 명품쯤 하나는 걸치고 있어야,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며 조금 더 당당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한 어린날의 짧은 생각이였다. 결과적으로 오판이다. 나는 나 다운것에 전혀 만족하지 못하고 있으며, 지금에 와서 그어떤 기억조차 남아있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작은것에 관심을 가져보려고 한다. 혹은 남들이 쉽게 지나치고 무시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의미를 부여하며, 그 안에서 재미를 찾아보려고 한다. 행여 그러한 것이 유치하고, 남들이 손가락질 하는 별 대수롭지 않은 것일 수 있을지라도 상관없다. 내가 재밌으면 된다. 내가 즐기면 되고, 그로 인해 내가 행복해지면 된다. 결국, 내가 사랑하면 되지, 남들의 사랑까지 필요로 하진 않는다.


지금 시대의 나 답다는 것이,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결국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캐릭터로 착각해 왔던게 아닌가, 곰곰히 생각해본다. 누구에게나 있는 40대라는 시간조차도,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습득된 삶의 방식에 따라, 남들이 좋다고 하니깐,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라고, 너무도 쉽게 단정해버리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조종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한번 더 생각해보고, 내가 생각하는 삶의 가치와 의미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도 따져보고, 그로인해 내가 정말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상상해보고자 한다. 섣부른 판단은 후회를 가져오기 쉽고, 이젠 그 후회의 상처가 너무 깊게 박힐, 치유되기 쉽지 않은 나이임엔 틀림없다. 이 쉽지않은 때에, 진정으로 나를 위한 의미와 가치를 찾아보고자 한다.


퇴근하는 길이다.

무심코, 요즘 부쩍 성장한 딸아이에게 전화를 하려,  통화기록에서 딸아이 번호를 찾고 있다. 그렇다. 딸아이의 전화번호 조차 나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그런 아빠였다.


여기서 부터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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