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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Apr 08. 2022

불편한 무조건적 자기 수용이 가져온 편안한 삶

  석사논문을 쓸 때였다. 어떤 변인으로 논문 쓰는 것이 좋을지 고심의 날들이 계속되었다. 주제를 잡기 위해 관심 있는 변인을 키워드로 논문을 검색해보고, 그 논문이 또 다른 논문을 부르며 이동하기를 며칠 그리고 몇 달째 하는데도 내 마음을 사로잡는 변인이 나타나질 않았다. 우스갯소리로 학사는 내가 뭘 모르는지 모르는 상태이고, 석사는 이제는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한껏 겸손해지는 시기이고, 박사는 내가 모르는 것이 정말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하는 시기라고 하였다. 나는 모르는 자의 호기가 가득한 석사 시절인 데다 내가 쓰고 싶은 주제를 써야 힘든 과정을 겪어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검색은 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봄날의 밤, 어렴풋하던 변인 하나가 선명하게 다가왔다. 바로 ‘무조건적 자기 수용’이라는 두 단어였다.



  자신에 대한 탐색과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 개념 형성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강점뿐만 아니라 약점 및 한계까지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뜻하는 이 개념은 그 당시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나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가 잘하든 못하던 내가 나를 그 자체로 인정해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는 나를 품어주는 여유 있는 큰 마음 같았다.


  

  또 한편으로는 살짝 깍쟁이 같기도 했다. 맺고 끊음이 확실한 느낌. 여기까진 되고, 이 이상은 힘들어. 다시 생각해봐. 하고 무 자르듯 나의 경계를 지어줄 것 같은 깍쟁이. 평소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메타인지가 흐리멍덩한 내게 이 개념은 나를 정교하게 만들어 내 삶의 허용범위와 한계를 명확하게 지어줄 것 같았다.      


  무조건적 자기 수용을 공부하면, 나는 나를 품는 넓은 여유와 함께 나를 좀 더 세밀하고 자세히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그리고 스스로를 인정해준다면, 그때 나는 나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며 한 발 내딛을 수 있는 힘이 생길 것 같았다. 나는 나를 성장시키면서도 내가 잘할 수 있는 일과 그 방향을 현명하게 선택해내고, 이를 지속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에너지를 쏟지 않고 내 영역에서의 나로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 나는 서른의 초입에 내가 너무 궁금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나로 살고, 나를 최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나의 한계는 무엇인지. 나는 그것들이 궁금했다. 아마도 내 삶를 나의 최선으로 살고자 하는 욕구가 반영된 것이지 싶다.       


    

  그렇게 무조건적 자기 수용은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석사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읽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논문의 주요 변인을 무조건적 자기 수용으로 정한 이후 몇몇 사람들에게 질문을 받았다.

  ‘수용이라는 게 스스로 한계를 설정하는 거 아니야?’

  ‘응, 난 이거 잘 못해. 하고 나면 더 노력할 생각을 하게 될까? 발전이 있어?’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뛰어넘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무조건적 자기수용을 수동적 삶의 태도로 여기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공부를 해보니,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사람은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율성도 높아지고, 환경에 성공적으로 적응할 뿐만 아니라 환경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으며 웰빙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더라며 이론적 근거에 따라 설명했다. 그리고 논문을 통해 무조건적 자기 수용이 행복에 이르는 유의미한 변인임을 밝혔다.    


       

  논문을 쓰고 공부를 하며 읽고 생각하는 동안, 내게 무조건적 자기 수용의 입체적인 매력은 더해갔다. 왜냐하면 무조건적 자기 수용을 내게 적용해보는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로서 나는 그렇게 궁금해하던 나에 대한 개념이 정교해져 감을 느꼈다.



  나는 나의 강점은 무엇인지 살폈다. 나의 경험을 되돌아볼 때 나는 무엇을 선호하고 한편으로는 꺼리는지 관찰해보았다. 그 증거로 나의 심리 생리적 신호에 귀 기울여서 내가 어떤 활동에 즐거운 정서를 느끼고, 또 어떤 행동에서는 심장이 빨리 뛰고 긴장하고 불안한지 살폈다.          


 

  나는 힘들더라도 혼자서 커피 한잔을 하는 시간이 있으면 충전이 되는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을 좋아했고, 또 쇼핑을 통해 소유하는 것을 즐겼다. 특히 쇼핑에서 한정된 돈을 여러 아이템으로 분산시키기보다는 클래식한 아이템 하나에 힘을 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안정적인 선택을 하는 편이어서 삶은 편안했으나 변화가 아쉬웠다. 하기 싫어하더라도 책임감에 끝까지 해내는 사람이었으나 땉이 무른 사람이었다. 소설이나 드라마보다는 비문학이나 강연 같은 글과 프로그램을 선호하는 사람이었고, 이에 연결되어 타인을 역지사지해보는 조망수용능력은 있으나 타인의 감정까지 함께 겪어주는 공감능력은 부족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강점과 약점은 서로 양날의 검처럼 함께였다. 강점과 함께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약점을 건드리는 것이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나의 약점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나의 한계를 스스로 파악하는 것은 나의 두꺼운 방어기제를 벗겨내는 의식적인 불편한 노력도 병행되어야만 했다.            



  나는 남들에게 피해 주는 것을 극도로 불편해하는 만큼 다른 사람이 내 영역으로 들어와 피해를 주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다. 주변 상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잘 못하는 사람이었다. 언어 능력은 강점이나 직관적이거나 논리수학적 지능 영역 발달이 부족했다. 글과 말로는 못할 것이 없었으나, 은행 업무처리는 창구에 가야 하는 생활 지능은 떨어지는 사람이었다.     



  내 한계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나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바라는 나, 부러움, 시기, 질투는 다 내 한계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평소 나는 농담처럼 ‘내 인생의 롤모델은 똑순이야.’ 하곤 했는데, 이는 내 생활 지능이 다소 부족함을 알고 생활의 일들을 능숙하게 처리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논리 수학적 지능이 뛰어난 사람들에 대한 경외감이 있었는데 이 역시 아무래도 내 수학과 과학 과목의 성적이 내게 심어준 패배감이 깔려있었는지도 모른다. 또 주변 동료들과 관계가 좋은 사람들을 한껏 부러워하며, 어떻게 저렇게 자신을 다 드러내며 대화를 하고 그 대화가 끊임이 없는지에 대해서도 부러워하곤 했었다.          



  이렇게 나의 무의식은 부러움, 질투, 시기심이라는 건강하지 못한 방식으로 표출되어왔었다. 그 과정에서 나에게 실망하고, 남을 부러워하는 삶의 방식에 나를 몰아넣고 있었다. 이는 미처 내가 스스로의 약점을 인지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 한계까지 내가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한계와 나의 강점을 파악하는 것에 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수용하기로 노력했다. 이 과정은 흥미로웠고 동시에 불편했다.



그러나 분명한건, 나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 나는 내 삶의 태도를 내가 만들어갈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방식은 끌어당기고, 내가 부족한 점은 인정하고 채워가는 태도를 다듬었다. 내 삶은 보다 가볍고, 편안하고, 유연한 방식을 취하며 나로 살아가는 형태를 띄게 되었다.



  나는 나의 언어능력이라는 강점을 알고 내가 글을 통해 배우고, 배운 내용을 글로 다시 풀어내며, 강의를 하는 나의 직업에 애착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브런치를 통해 글을 쓰고자 하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내가 잘하는 쪽으로 내 삶을 이끌고 있다.      



  나는 사회성이라는 약점을 안다. 그래서 여럿이서 만나는 모임보다는 의미 있는 두 세명 정도의 만남을 선호하고 그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쪽으로 관계 맺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늘 안정적인 삶을 탈피하고자, 그리고 내 생각을 되돌아보고자 나와 생각의 방향이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리고 유머를 배우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내 의미 있는 사람들이 가끔

  “김주윤 사람 된 줄 알았는데, 아니네?”

하고 농담을 건네면, 예전 같은 면 ‘본인은~너는! 하고 불만을 가졌을 내가

  “아~또 들켰네!”하고 웃어넘긴다.

왜? 나는 내 약점을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들도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이렇게 나의 강점과 약점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용기는 내 삶을 좀 더 편리하게 해 주었다. 불필요한 에너지를 쏟는 대신, 내가 좀 더 잘 기능할 수 있는 삶의 방향으로 나를 이끌어주었다.

그리고 편안해졌다. 내 한계의 명확한 인지는 그 부분을 노력으로 채울 수 있는 건강한 에너지를 주었다.      



  아마도 나는 하루씩, 그리고 매달, 매년 변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강점과 약점도 이를 반영하듯 변해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의 무의식의 소리에 내가 귀 기울이는 무조건적 자기 수용의 자세는 꼭 가져가기를 소망한다. 그 불편한 과정이 나의 삶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 줄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이 것만으로 나는 공부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배운 다는 것이 주는 선물에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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