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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Apr 11. 2022

'왜?'라는 질문의 방향

질문의 기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으면 내가 궁금해하는 것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떤 대상이나 현상에 대해 궁금해한다는 것, 즉 질문에는 질문하는 사람의 욕구와 그 욕구의 방향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건 왜 그러는 거야? 그 사람은 왜 그러는 거야?”

"왜"라는 질문에는 '이해'를 구하는 욕구가 반영되어있다. 하지만 그 이해의 대상은 다르다. 어떤 '왜?'에는 상황이나 대상을 이해하려는 욕구가 반영되어있다. 반면 또 다른 '왜?'에는 자신이 이해받고 싶은 욕구가 반영되어 있다.  우리는 자신이 던지는 "왜"라는 질문에 담긴 욕구를 파악하고, 그 욕구의 방향을 좀더 나은 곳으로 이끌어야 한다.


          

  먼저, '왜 그러는 거야?'에는 자신이 이해받고자 하는 욕구가 반영된다. 이때는 대상이나 상대의 말과 행동, 현상이 내게 남긴 손해에 주목한다. 해당 현상과 행동이 내 평화롭고 잔잔한 삶에 던진 돌의 파동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욱 크고 넓어진다. 이런 생각은 계속 불어닥쳐 나의 삶을 공격한다. 그 일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현재와 내 생각 속 미래에 미치는 영향(아마 실현되지 않을 수 있는) 생각하느라 현재를 불균형의 상태에 놓는다. 그리고 상대 및 현상의 부정함을 더욱 확실하게 해두기 위해 상대와 현상이 가져왔거나 앞으로 가져올 가능성이 높은 갖가지 문제점들을 될 수 있는 대로 최대한 샅샅이 찾아 오늘로 가져온다. 내 오늘의 삶은 그로 인해 이만큼이나 피해를 보았다고 전시해둔다.           



  이제 진정한 이해를 원한다면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현상과 대상이 내 시선으로 오염되지 않기 위해 늦지 않은 시기에 구조활동이 병행되어야 한다. 내가 열심히 CPR을 했다면, 이젠 구조대를 부를 차례이다.           


  '왜'라는 질문에 자신이 이해받고자 하는 욕구를 반영시켰을 때는 공감과 나의 분노에 대한 타인의 정당성 확보가 필요하다. 이에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나, 나의 생각에 반박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구조대를 꾸린다.       


    

  결이 같은 대화는 공감과 함께 위안을 남겨준다. 위로의 말은 마음에 불러일으킨 화를 가라앉힌다.

  '그랬구나.

  '고생이 많았네.'

  '정말 너무한 거 아니니?'

  '무시해.'

  '너니까 되니 이렇게 넘어가지.

이런 말들로 인해 현상에 대한 나의 자동적인 분노와 어려움이 이해받고 그럴 수 밖에는 없었다는 정당성이 공고화된다. 그리고 나 정도 되니 이런 어려움을 극복한다는 효능감을 얻는다. 함께 분노하고 공감해준 이들과의 돈독해진 유대감은 덤이다.



  더욱이

  '나는 이런 상황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자신의 분노 포인트를 알게 되고, 내가 어떤 현상과 대상을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관한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점차

'나는 이런 사람이야.' 하는 자기 개념의 지도를 그려간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면, 나는 삶 앞에서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된다. 분노하고, 나와 타인에게 공감을 얻고자 피해사실들을 오늘에 모아두는 활동에 몰두하느라 오늘을 잊는다.

'나는 그런 사람이야.'

하는 이해로 마무리했을 때, 우리는 삶에서 끝나지 않는 역경의 다카포의 연속에서 수동적으로 반응할 뿐 내 행동을 의식적으로 우아하게 선택할 힘을 잃는다.     


      

  우리는 또 다른 ’왜‘로 나아가야 한다.           



  내 삶을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한 ’왜‘를 질문하는 사람은 대상이나 현상 해결에 주목한다. 이들은 문제를 관찰자의 시선에서 바라보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해나간다. 주관적인 생각 안에서 현상이나 대상은 내 시선으로 수정하고 변형해두느라 본래의 형질을 잃게 된다. 이렇게 재편집된 현상은 고작해야 나만을 이해시키거나 또는 그마저도 실패한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여 내 삶에 이로운 방향으로 질문을 껴안고자, 이들은 현상과 대상을 주관적 해석을 하는 과정에서도 주관적 해석이 과하지 않기를 노력한다.    


       

  대상에 대한 관찰자의 이해를 통해 진심으로 문제의 이해를 원하는 사람은 나의 주관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구조대로 꾸리고 그들의 의견에 귀 기울인다. 그들에게는 나와 다른 시선으로 현상을 볼 수 있는 타인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현상에 대한 이해라면 관련 도서를 읽어보는 것도 좋다. 하지만 텍스트는 주관적 해석이 개입하는 장치이므로 이를 조심해야 한다. 또 다른 방법으로 평소 나와 다른 시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런 지인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그래, 너 잘났다.'

하고 아니꼬울 때도 있고, 너무나 많은 이유가 있어 너무나 타당했던 내 생각이 갑자기 찌그러지는 듯한 불쾌함이 들 때도 있다. 또 순간 부끄러움에 상기된 볼을 숨기느라 말을 얼버무리고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얼굴의 열기가 이동된 마음이 함부로 날뛰며

'왜 그때 이렇게 말 못 했지?'

하고는 그때 했어야 했던 말을 혼자 되뇌기도 한다.        


   

  불편했다는 것은 내 생각과 달랐다는 뜻이다. 내 생각이 닿지 못한 구석까지 내 생각을 쭉 끌어당기고 버티느라 생각에 근육통이 남았다는 것은 대상에 한 발짝 더 다가갔다는 시원한 의미를 갖는다. 운동 후에는 근육통이 남아야 제대로 운동한 것이고, 생각 후에는 불편함을 경험해야 제대로 생각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 덕분에 내가 알지 못했던 내 생각의 면적을 찾고 넓혀가는 동안, 대상에 대한 이해의 면적도 넓어진다.           


  더불어 나의 생각 역량이 넓어진다. 입체적인 대화는 나의 주관적이고 자동적인 생각과 타인의 생각의 만남으로 내 생각의 면적이 넓어지기도 하고, 두 생각 간의 화학작용으로 새로운 형질의 생각으로 재구성되기도 한다. 의미 있는 타인과의 대화 이후, 새롭게 구성된 내 생각은 이전과는 비슷한 현상과 대상을 대할 때, 심리적 불편함을 다소 완화시켜줄 뿐만 아니라 우아한 대처능력을 갖게 해 준다. 이는 내가 평생 동안 스스로의 균형 있는 발달을 위해 생각의 영양분을 골고루 먹여주는 것과 같다.        


   

  생각이 건강해진 나는 내 삶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다. 대상을 내 삶으로 끌어들일 것인가 또는 안정만을 한 채 거리를 둘 것인가. 삶의 사태가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예전과 같이 분노할 것인가 또는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로 맞설 것인가.

     

  나에 대한 이해의 궁극적 목표는 나의 삶을 더 나은 쪽으로 이끌기 위함이다. '왜'라는 질문에 반영된 나의 욕구를 이해했다는 것은 이젠 그래서? So What? 의 차례로 넘어갈 시그널이다.  


  나의 욕구가 의미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현상과 대상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만나는 방향으로 욕구의 운전대를 쥐고 방향을 틀 차례이다.

언제나, 그리고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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