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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Apr 22. 2022

망설임을 걷어낸 앞머리라고나 할까요

  “동생 결혼하는데 화장해야 하잖아. 결혼식 아침에 7시까지 샵으로 와.”

  “응? 그러면 우리 주윤이도 챙겨야 하는데 번거로울 것 같은데. 엄마 나는 그냥 안 할래.”

  “그래도 사람들 오는데?”

  “사람들? 뭐, 나 보러 온대? 난 안 해도 돼.”   


       

  동생의 결혼식날 누나가 되어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외모로 참석하지는 못했다. 너무 분주하지 않은 오전을 보내고 아들과 남편이랑 함께 차분하게 결혼식을 가고 싶었다. 집에서 평소처럼 머리를 묶고, 예식장 전용이자 내 마음에 드는 원피스를 입었다. 남편의 2벌뿐인 양복  무엇이  오늘의 몸에  핏이 되는지 예리하게 살펴 조언해주었다. 며칠  주문한 아들의 슈트에도 나비넥타이를 매칭 하며 삼촌 결혼식에 멋지게 참석하는 매너를 아들에게 온갖 잔소리로 전수해주었다. 우리는 그날 아침, 가족 행사에 셋이   있는 최선의 멋을 부렸다. 예식에 대한 이런 차분한 예의가  마음에 들었다.


           

  망설임의 대가이자, 망설임계의 히로인이었던 과거를 뒤로하고 언젠가부터 나는 선택이 단호해지는 나를 발견한다. 물론 언제나 내 안에는 너무 많은 내가 있지만, 그래도 말끝을 흐리고 선택권을 넘기던 예전의 나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긴 것을 느낀다. 나이가 들수록 선명해지는 것은 주름만이 아니다. 나 자신도 스스로에게 선명해진다.


           

  어언 10여 년 전쯤, 뱅 헤어가 휩쓸었던 어느 가을에 대한민국 여자라면 모두 앞머리가 있던 때가 있었다. 헤어스타일은 언제나 효율성이 높은 미의 액세서리가 분명했다. 누군가의 앞머리는 시크해 보였고, 누군가의 앞머리는 사랑스러웠고, 누군가의 앞머리는 우아해 보였다. 당시 친한 동료 중 나의 동기 빼고는 다 앞머리가 있었는데, 어느 날 마지막 남은 내 동기마저 앞머리를 자르고 오더니 한결 상큼해졌다. 조선 천지에 다 앞머리가 있는데, 나만 없다.



  나는 다니던 미용실에 가서 용기를 내어 앞머리를 내어달라고 말하려 마음먹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몇 번을 고민했는지 모른다.

  “저기요, 혹시 저 앞머리 자르면 어떨까요?”

왜 잘라주세요! 못하니... 나는 말을 꺼낼 때도 망설이고 있었다. 대신 내 앞머리의 행방에 대한 결정을 미용사분께 톡! 하고 토스했다. 나의 헤어스타일을 오래전부터 해주시던 미용사분께서는 단번에, 그리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N0!”



  그리곤 그때부터 왜 내가 앞머리가 있으면 안 되는지 전문가적 입장에서 설명해주셨다. 내 얼굴은 이마가 좁은 편이고, 얼굴형은 전체적으로 세로 길이가 짧고 동그랗기 때문에 앞머리를 자르면 얼굴이 더 납작해 보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앞머리를 자르면 지금의 부드러운 이미지가 아닌 좀 사나워 보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다.


          

  미용사분의 조언에 나는 마치 지금은 대단히 미인인데 앞머리만 자르면 못생겨질까 싶었나보다. 스스로에 대한 오해와 오개념이 상당했지 싶다. 그래서 앞머리에 대한 고민에 미래의 못생겨질 얼굴에 대한 두려움까지 합세했다. 결국은

  “네.”

하고 앞머리에 대한 내 바람을 쓱 거두었다. 미용사분은 가끔 앞머리가 하고 싶으면 요즘 앞머리 가발 많으니 그걸 활용해보라고 해주셨었다.           



  20대의 나는 뭐가 그렇게 망설여졌을까. 언제나 20대는 도전과 시도가 장려되는 시기인데 왜 나는 앞머리 하나에도 벌벌 떨었을까. 사실 앞머리가 없을 때 내 외모가 아주 굉장한가 싶은데, 앞머리 하나에 분위기가 달라지고 못생겨질 얼굴이라면 사실 그건 앞머리 때문이 아니지 않나. 이걸 지금은 아는데, 그때는 참 이런 것 하나에도 고민했고, 망설였다. 그리고 남의 말을 듣고 나를 결정했다. 왜 그랬을까.          



  언젠가 엄마가 언니와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말을 했다.

  “주윤이도 대학 때까진 착했어.”

그 말을 듣고 나는 지금의 생콩함은 30대부터 시작이었구나. 하고 또 나를 알아차렸다.



  아마 나는 20대엔 소위 말하는 착한 여자였던 것 같다. 내가 원하는 것은 말하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 말을 듣고 함께 했었다. 주위 사람이 있을 때는 그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웃으며 말했고, 대부분 “응, 그래!”하고 호응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없을 때에도 내 마음속엔 그 사람들의 시선이 있었다. 내 옷을 사거나, 심지어 내 얼굴에 앞머리를 자르는 일을 원할 때에도 내 마음속엔 그 시선들을 신경 썼다.

  ‘사람들이 별로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그럴수록 내가 원하는 일을 말하는 것은 망설여졌고, 내가 원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봐 남들에게 선택을 맡겼다. 그랬더니 나는 내 인생에서 착한 시절의 한 챕터를 보낼 수 있었다.           



  사실 그땐 그런 나의 태도가 자연스러웠고 편했다. 그리고 이렇게 망설이는 것이 나의 특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당시 나는 취향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불호가 없었던 나는 뭐든 괜찮았다. 음식에 있어 편식도 없었고, 딱히 못하겠는 일도 없었고, 어떤 친구들과 함께여도 괜찮았다. 20대의 나는 이미 만들어진 세상에 나를 잘 재단해서 끼워 맞추는 일이 어렵지 않았고, 도리어 그걸 잘하면 잘 적응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왜 나는 30대부터 안 착해졌는가. 먼저 정리를 하자면, 나쁜 것과 안 착한 것은 다르다. 내게 나쁜 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라면, 안 착한 것은 더 이상 나를 끼워 맞추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즉 내 생각을 타인에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드러낸다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시선을 내 마음속에서 거둬들이는 일이다.          



  아마 나는 20대 착했던 시절의 일과 사람에 대한 경험을 통해 내가 하면 잘 되는 것, 해도 안 되는 것, 할 수 있는데 불편한 것, 별로 잘하고 싶지 않은 것, 정말 잘하고 싶은 것을 어렴풋하게 체에 걸러왔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30대의 나는 잘하고 싶은 일에는 손을 힘껏 들어 열심히 했고, 별로 잘하고 싶지 않은 것에는 에너지의 스위치를 껐다. 만나서 즐거운 사람들에게는 연락도 하고 만나기도 하지만, 만나고 나서 기가 빨리는 사람과는 관계를 정리했다. 



  이 과정도 의도적인 노력을 한 것은 아니었다. 30대의 체력은 20대와는 달라서 하나에 몰두하면 자연스럽게 에너지가 떨어져서 하고 싶지 않은 일에 닿을 에너지가 없었다. 사람을 만날 때도 물리적인 시간도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맥주 마시다가 와인을 마시게 되고 인터넷 쇼핑몰에서 100% 쇼핑을 하다가 백화점도 한 번씩 가게 되면서 기왕이면 내 시간과 돈을 좋은 곳에서 좋은 사람과 쓰고 싶어졌다.  그렇게 자연스레 좋은 사람에게만 연락하게 되었고 그 몇몇 의미 있는 지인들과 서로 좋은 곳에서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30대의 시간들은 타인의 시선에 조각도를 맡겨두고 타인의 시선에 따라 성형해둔 어설픈 나를 꺼내서, 나의 손에 직접 조각도를 쥐어준 계기가 되었다. 나는 조각도를 내 손에 쥐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잘 걸을 수 있는데 적합한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을 다듬었고 그 두 다리로 걷고 싶은 곳을 걷고 산책했다. 내 손가락이 타자기 앞에 내 생각을 드러낼 수 있도록 정교하게 가다듬었다. 내 생각의 회로를 단순하게 바로잡았고, 생각이 배려의 흐름을 타고 내 생각을 우아하면서 유머가 있는 말에 분명히 담을 수 있도록 성형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안 착한 사람이 되었다. 내 거 하느라,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안 쓰던 근육이 퇴화하듯 다른 사람의 시선에 반응하던 안테나가 무뎌졌다. 그렇게 40대가 되었다.

         

  올봄, 앞머리가 자르고 싶어졌다. 미용실에 가서

  “앞머리를 잘라주세요. 어차피 머리는 다시 길잖아요.”

  하고 말했다. 앞머리는 잘라졌고, 역시나 전문가의 조언은 틀림이 없었다. 어려 보인다고는 하나, 예쁘진 않다. 그리고 어려보이는 것이지 어려진 것도 아니다. 더욱이 중학교 졸업 이후 첫 앞머리가 어색하기만 하다. 그래도 뭐 어떤가. 한 번쯤 머리카락으로 장난 한번 쳐 보았던 봄에 대한 재미진 경험이면 충분하다. 올봄에 거울을 보면, 장난 같은 앞머리를 한 중년의 내가 서 있다.

          


  앞머리 덕분에 변화도 생겼다. 그래도 살짝 이전과는 분위기가 달라 보인다. 그 덕에 요즘엔 평소엔 잘 안 입던 청바지를 자주 입게 되었고, 긴 니트보다는 짧은 니트에 손이 간다. 뭔가 앞머리에는 경쾌함이 어울리는 것 같아서이다.  


  좀 못나보이면 어떠한가. 앞머리 하나로 다른 봄이다. 내가 재미있으면 그걸로 되었다. 어색하고 못생긴 앞머리가 내 마음에 들어서 자주 재미있는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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