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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May 17. 2022

내 삶의 영양소

  “있잖아. 우리 조카가 집에 와서는 내 물건을 너무 함부로 만지는 거야. 그래서 내가 내 물건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했더니 뭐라고 했는지 알아?”

  “교수님 조카 말 잘하잖아요. 뭐라고 했어요?”

  “이모! 유치원 선생님께서 남의 물건을 자기 물건처럼 써야 한다고 하셨단 말이야!”

  “네?!”

  조카가 너무나 당당한 말투로 했다는 말에 빵-! 터져서 한참을 웃었다.           



  이 사회에 적응해버린 순응적인 어른들에게 저 문장은 그저 하나의 뜻만을 가진다. 분명 선생님께서는 남의 물건도 내 물건처럼 소중히 다루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세상의 말들을 이해할 때 경험보다는 자신만의 인식 회로에 의해 해석하는 일곱 살 어린이에게 저 문장은 다른 의미였던 것이다. 일곱 살에게 저 문장은 이렇게 해석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내 물건을 마음 편히 마음대로 쓰듯이 남의 물건도 편하게(함부로) 써라.’



  여러 자극들에 노출되며 살아가는 우리는 그 자극 중에 나에게 의미 있는 자극들에만 반응하고 흡수한다. 티셔츠를 쇼핑할 때만 해도 어떠한가. 수십만 개의 티셔츠 중에서 나는 하나의 티셔츠에 주의(attention)를 기울인다. 그때 나머지 수십만 개의 티셔츠는 내 주의를 끌지 못한다. 그렇게 무엇인가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그 외에 나머지 것들은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이렇게 선택의 문제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과연 나는 어떤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는가 하는 것은 내 삶을 이루어나가는 데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주의를 기울였다면, 이제 나는 해당 티셔츠를 지각(perception)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이 티셔츠가 왜 또는 얼마나 필요한지(이때 여행이나 주말 나들이를 앞두고 있다면 더 이상 이유는 필요 없다.), 얼마나 나에게 어울리는지, 내가 가지고 있는 하의를 얼마나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게 하는지에 관해 생각하며 티셔츠를 사야만 하는 의미를 부여한다. 또 이 티셔츠의 색감은 어떻고 재질은 어떠하며, 목선이 얼마나 내려와 있으니 나의 빈해 보이는 목을 잘 커버해줄 만한지에 대한 해석의 과정도 거친다. 이렇게 티셔츠를 지각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의미부여와 해석의 과정은 내가 이 티셔츠를 살지 말지에 관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무수히 많은 자극들 속에서 나는 단 몇 개의 자극에만 선택적으로 주의를 기울인다. 그렇게 주의를 기울인 대상을 지각하며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거치면 이것은 나만의 기억으로 저장된다. 이렇게 저장된 기억들은 나의 어제와 오늘의 삶의 자산이 된다. 더 나아가 내일 어떤 것에 어떻게 반응하고 해석할 지에 관한 생각의 방향을 결정한다.           



  교수님 조카의 발칙한 한 마디에 너무 많이 왔다 싶다. 어린이의 한 마디에 인지를 거론하는 자체가 너무나 고루한 이 어른은 아무래도 욕심이 많은가 보다. 어떻게든 한번 잘 살아보고 싶은 욕심이 많은 가 보다.            


  그날 이후, 욕심이 많은 나는 내 삶을 두드리는 수많은 자극 중에서 좋은 자극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하다. 내 삶을 즐겁고 아름다우며 건강하고 지혜롭게 구성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자극들이 나를 노크할 때 이를 알아채고 그것만을 집중해서 바라보고 반응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나를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자극을 알아챈 후, 그 자극들을 아름다운 방향으로 해석하는 생각의 힘을 가지고 싶어졌다. 그래서 내 삶의 경험을 좋은 것들로 해석한 알록달록한 칸이 많은 생각 저장고를 가지고 싶어졌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싶어서 생각한 것들도 모두 다 내 삶의 바운더리 안에서 선택된 것들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내가 배운 것들과 생각한 것들을 샅샅이 뒤져본다. 그렇게 두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먼저 주변에 좋은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할 것. 한 사람은 그 사람 주변에 있는 4명의 총합이라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가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지내는 4명의 사람을 보면 된다는 의미이다. 그만큼 인간관계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의미인데, 돌아보면 나의 삶도 그랬던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때, 수업시간에 우연히 옆을 보다가 한 친구가 단연 눈에 띄었다. 중고등학교 6년간 등교를 거의 같이 하던 친구였는데, 같이 걷고 놀았지만 수업시간 그 친구의 태도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친구는 누구보다 허리를 의자에 꽂꽂하게 세우고 고개를 바짝 들어 진지한 눈빛으로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평소 허리와 어깨가 구부정했던 나는 그 친구를 보고 허리에 힘을 바짝 주고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꼿꼿하게 붙였다. 마치 굽어진 허리가 다림질되듯 펴지면서 얼마간의 찌릿한 가벼운 통증도 느껴졌었다. 그리고 어깨를 펴고 선생님의 눈을 따라갔다. 그렇게 나는 그 시절 성적이 꽤나 올랐었다.    


       

  이후 만난 몇몇 사람들에게서 나는 배웠다. 그들은 자신의 공부에 진심이었고, 자신의 일에 책임을 다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100%라면 101%의 차이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서 나는 노력과 책임감의 태도를 배웠다. 또 어떤 친구의 유머러스함은 언제나 나의 동경의 대상이었는데, 특히나 지인이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유머러스한 말로 위로를 주는 것이 탁월했다. 나는 그 친구만큼의 유머를 새롭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 친구가 했던 말을 내가 처한 상황에서 적절히 써먹기도 하였다. 그때 어색한 상황이 좀 더 가볍고 사르르 풀리던 그 희열을 나는 기억한다. 그리고 어떤 친구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말을 했었다.

  “내 가족에게 가장 좋게 말하고 잘 대해줘야 하더라고.”



  그 당시 이 말은 내게 오래 맴돌았다. 언제나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고 정 없는 둘째 딸인 나는 밖에서는 온순해도 집에서는 짜증을 냈고 말은 짧았다. 그런 내가 들어도 친구의 그 말이 맞았다. 물론 나는 지금도 무뚝뚝한 딸이지만, 그래도 노력한다.

  ‘좋은 마음을 좋은 말에 담아야지.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족에게.’

그 이후 나는 가족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미안하다 말하게 되었다.        


  

  좋은 사람은 좋은 책과 같아서 주변의 좋은 사람들과의 대화와 그들이 보여주는 삶의 태도는 나에게 언제나 배울 점이 되고 나를 성장시켜왔다. 내 삶에 좋은 사람들과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어떤 것보다 중요한 시간이다. 사실 여행을 가도 누구와 함께이냐는 여행을 의미 있게 만들어나가는 데에 아주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잠깐의 여행도 그럴진대, 우리 삶에서 좋은 사람과 함께 하루를 겪고 나이를 먹어가는 시간은 삶의 중요한 영양소이다. 좋은 것을 먹으면 건강한 몸이 되듯이 좋은 사람과 함께인 삶은 아름답고 건강하다.           



  내 삶의 기억을 좋은 것들로 저장하기 위해 내가 생각한 두 번째 방법은 다양하게 읽고 배우는 것이다. 삶의 사건에 대한 의미부여와 해석은 나만의 신념을 구성한다. 이 과정에서 내 경험과 배움과 앎과 생각이 편협할 때 내가 부여한 의미와 해석은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것보다 쓸모없을 수 있다.     


      

  사람들은 적은 양의 정보를 알고 있을 때 결정과 판단이 빠르다. 이후 삶의 과정에서 새로운 정보가 업데이트되지 않은 채 과거의 배움에 의존하는 결정은 단호할 수 있겠으나 고루해질 수 있다.           



  고루함은 무엇보다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노벨 경제학을 수상한 심리학자인 대니얼 카너먼에 의하면 사람들은 잦은 경험으로 신념을 형성하면 이것을 편안하게 느끼는데 이는 곧 그 사람에게 좋은 것이 된다. 이때, 사실 정보임이 분명하지만 내 신념과 상충이 된다면 사람들은 아무리 그 새로운 정보가 사실이라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 좋음이 불편함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에게 불편한 것은 곧 좋지 않은 것이 된다. 너무나 잘 알려진 예이지만, 갈릴레이의 지구는 돈다는 이론이 그 당시에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를 생각해보면 이는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나는 이것이 두렵다. 내 현재의 생각은 현재 내가 읽는 책에서 뼈대를 구성했고, 살을 붙여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아무래도 나의 기호에 따라 내가 읽는 것들의 폭이 좁아진다면 나도 고루한 어른이 될 까 봐 걱정이 된다.  니체의 말처럼 새로운 생각은 내 머리를 도끼로 깨는 듯한 충격이 있어야 한다. 니체만큼은 아니더라도 새로운 계절의 바람이 불어올 때 내가 만든 창으로 막아서기보다는 기꺼이 맞아보는 배움의 태도를 갖고 살아가길 바라본다.



  시간 앞에 영원한 것은 없다. 시간에 따라 내가 노화되듯이 생각은 시간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고 이러한 흐름이 곧 자연이다. 새로운 세상이 보여주는 배움에 게을러지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분야에 더하여 다른 분야의 책과 글도 언제나 진심으로 읽으며 내 생각을 낯설게 바라보기를 바란다.      



  신기한 것은 요즘 지인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많은 대화 중에 잠깐이지만 서로 괜찮았던 책을 소개하기도 하고, 연말에 서로 좋았던 책을 선물해주기도 한다. 의도적으로 이렇게 하자! 한 것은 아닌데도 자연스럽게 이런 일이 생긴다. 역시 사람인가 싶다. 좋은 관계인가 싶다. 그들이 마치 나의 바람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내가 읽는 것들은 나의 선택에 더하여 지인들에게 의미 있던 새로운 책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런 만남에는 작가의 생각에 더하여 나와 그들의 생각이 공존한다. 결국 사람인가 싶다. 좋은 사람들인가 싶다. 그들의 삶도, 그들이 전해주는 책도 모두 내 삶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양질의 영양소가 되어준다.    


       

  나도 그들에게 내 세상을 보여주는, 그래서 좋은 사람이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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