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일기, 엄마의 생각, 낙관육아
삶은 늘 단면이 아닌 양면이었다. 기쁨의 이면에는 이 기쁨이 훅 꺼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다른 면에 찰싹 붙어있었다. 눈물이 차올라 터트려지고 나면 후련함이 함께였다. 출산과 육아도 그랬다.
36주 5일째 이른둥이로 태어난 나의 아가를 만날 수 있음 그 자체에 충실히 감사했던 첫 만남에서 나는 낯섦을 함께 느꼈다. 어쩌면 나다움의 가장 대표적인 낯가림이라는 취약점. 때론 타인을 내 마음속에 천천히 가라앉게 해주어서 밀착된 마음을 갖게 해주기도 했던 나의 본질적 특성. 그 낯가림은 내 아가에게도 발동되었다. 사람은 안 변하나 보다.
남편은 어느새 태양이의 존재를 기쁘게 받아들인 반면, 나는 서먹했다. 그리고 이 불편한 기분. 낯설음이라니! 엄마라고 하면 아이를 가슴에 안는 순간 본능적으로 모성애의 싹이 먼저 틔워지는 게 아니던가!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의 온화하고 충만한 기쁨의 장면은 언젠가부터 서서히 내게 주입이 되어있었다. 그게 엄마다운, 엄마의 아름다운 모습이 맞았다.
그 엄마가 나는 아니다. 나는 지금 내 아가의 울음, 손 발의 움직임, 어딜 보는지 모르는 시선에 한껏 낯설다. 아이가 운다. 왜 우는지 모르겠는데 운다. 잘 시간이 되어 동요를 부르면서 무릎을 굴려 엉덩이를 들썩들썩하게 해 주니 드디어 잠이 들어 침대에 뉘이고 돌아서는 그 승리의 순간, 아이는 갑자기 동그란 눈을 반짝! 떠올리며 나를 본다. 그때의 이 패배감. 아이가 울면 다 서툰 내 탓인 것만 같은 이 주눅 드는 기분은 나의 낯섦과 당혹스러움에 더해져 갔다.
낯섦은 아이뿐만이 아니었다. 내 몸의 선명한 변화도 내게는 당혹스러움이었다. 기쁨으로 충만했던 내 둥근 배는 푹 꺼졌다. 동시에 하루의 시간은 이제 나를 위한 일들이 아닌 낯선 움직임과 배고픔에 우는 아가 중심으로 채워졌다. 나는 자주 아가를 책임감으로 안아주었다. 그래서 나는 몸과 마음이 고단했다.
탈락한 느낌. 나는 엄마라는 세계의 부적응자이다. 갑자기 나에 대한 실망과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내가 지금 할 일은 이 당혹스러움과 낯섦을 최대한 이불속에 꽁꽁 감추는 일이다. 들키면 내가 정말 나쁜 사람인 것 같아 도무지 누구에게 말하기가 무섭다. 주변 사람에게 말을 하기도 겁난다. 나를 나쁜 사람으로 볼까 봐. 모성도 없는 냉혈한이 될까 봐. 사실은 아이가 내 마음을 알아차릴까 그게 가장 겁난다. 왜 나는 이 시간이 감사하지 않지. 제발 감사하고 싶다.
"발령받으면 일하는 거지."
이 문장이 호주머니에서 튀어나온다. 10여 년 전의 겨울, 내 입에서 불쑥 튀어나왔던 그 말. 나와 친구들은 2월에 막 대학교 졸업을 하고 아직 살아보지 못한 사회의 문고리를 막 잡던 순간이었다. 발령은 3월.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 이제 틀려도 되고 몰라도 되는 학생이 아니라 프로의 세계로 진입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은데, 아니 준비가 안 된 게 확실한데 3월부터 바로 일을 할 수 있을까. 두려움은 곧 눈앞의 현실이 되어 시속 300km로 달려오고 있었다. 서로의 불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불쑥 말했다.
"발령받으면 일하는 거지. 어떻게 해? 무를 수 없잖아. 그냥 해야지 뭐. 하다 보면 더 나아지지 않을까. 차례 미루기가 안 되잖아. 그냥 해야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왔던 그 말은 순간 내 귀를 통해내 마음에서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그 오후, 나는 그 말을 내 호주머니에 고이 접어 두었다. 그리고 용기가 필요한 순간 꺼내본다.
"그냥 해야지, 뭐."
자지러질 듯 우는 아이를 등에 업고, 황급히 분유를 탔다. 행여 물 온도가 뜨거울까 싶어 허공에 휘휘 저어 급히 김을 날리고 정량의 분유를 탔다. 젖병을 꿀떡꿀떡 빠는 아이의 입술과 목 넘김에 내 허둥거림이 뿌듯해진다. 아이가 또 운다. 그런데 뭔가 달라졌다. 내 기억 속 아이의 울음은 그 모서리가 한껏 날이 선채 쨍한 소리여서 내 귀와 마음에 꽂히는 듯 상처를 내곤 했는데, 오늘 울음의 모서리는 꽤나 뭉툭하다. 앵앵하는 듯한 그 소리. 그 울음은 내 마음을 간질거린다. 이그~엄마가 간다. 내 걸음에도 여유가 생긴다.
예방 접종을 하는 중대한 오후. 남편은 아기띠에 내 아가를 담고, 행여 초겨울의 찬 바람이 아가에게 닿을까 싶어 그가 가진 가장 풍덩한 초록 패딩을 입어 아이를 덮었다. 지퍼를 올리니 남편 얼굴 아래 아가 얼굴만 동그랗게 보인다. 초록 캥거루 부자를 보니 웃음이 난다. 의사 선생님의 청진기가 아이의 심장에 오래 닿는다. 의사 선생님께서 주의하며 심장의 여러 소리를 들어보시는 모습에 내 마음이 두 근 두 근대며 온갖 걱정들이 달려온다. 혹시 이른 둥이여서 심장이 좀 약한가. 소리가 이상한가. 1분이 채 안 되는 그 시간에 내 마음에는 온갖 유해 미세먼지가 가득 찬다. 괜찮다는 선생님의 한마디에 이내 내 마음이 가을하늘 보다 맑고 푸른 개운한 하늘이 된다. 주사를 맞고 날카롭게 우는 아이를 보고, 내가 대신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주사를 싫어하는 쫄보인 내가 이런 생각이 드는 게 불쑥 놀랍다.
목욕을 시키며 그 작고 보드라운 손을 만져본다. 이 손으로 오늘도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지. 웃음이 난다. 아직 세상에 닿지 않아 보송보송하고 봉긋한 발바닥을 닦아준다. 이 발이 납작해지고 건조해지면 나는 너무 슬플 것 같다. 안 걸었으면 좋겠다. 이 아까운 발로 세상을 걸으면 얼마나 힘들까 싶다.
나는 역시 무얼 하든 시간이 필요한 느린 사람이었다. 50 일하고 보름이 지난 오늘. 그동안 내 아가와 함께한 시간과 노력들이 나와 아가 사이에 있다. 그 누구도 공유하지 못하는 나와 아가만의 은밀한 대화, 실패와 잔잔한 뿌듯함. 안쓰러움과 측은함. 사랑스러움과 감사함. 우리의 시간을 채운 세세한 기억들로 나의 아가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이 드디어 내 온 마음에 스며들었음을 이제 깨닫는다. 수천 개의 면에서 반짝이는 내 아가를 안으면, 내 마음이 더 부풀어 오른다.
해봐야 안다. 그것도 온 마음과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 때만 얻을 수 있는 게 분명히 있다. 나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덥석 잡을만하다. 시간과 노력이 담긴 걸음이 있어야 의미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 어쩌면 그냥 하는 것, 그냥 하면서 진심을 다해보는 시간들이 내 삶의 무늬를 한 땀 한 땀 수놓아 왔었다. 내가 새롭게 진입한 육아라는 세계도, 나의 아가라는 세계도 그런 게 분명하다. 내가 달라진 걸 보면.
나의 아가는 태어났을 때보다 10cm가 컸고, 몸무게는 2배가 되었다. 하지만 나의 태양이는 내가 책임의 무게로 안았을 때보다 지금이 더욱 가볍다. 내가 타준 우유를 먹고, 내가 안아서 키운 나의 아가가 쑥 커서 배넷저고리를 못입는게 너무나 아쉬운, 내가 살아온 날보다 50여일이 더 아쉽게 느껴지는 우리의 시간이 여기 있다. 아름다운 나의 아가는 내 마음에 스며들었고, 나는 나의 아가와 함께 있는 시간이 참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