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효능감 낙관육아 육아일기
"그때 되면 생각하려고요."
임신 중, 모유수유의 힘겨움을 말하며 나의 실천의지를 묻는 지인들에게 했던 나의 대답이었다. 여행도 계획을 안 세우는 나인데 모유수유에 계획을 세웠을 리 없는 나 아닌가. 그 어렴풋함의 바닥엔 학업도, 연애도, 결혼도 남들 하는 만큼은 해가며 평균의 모습으로 살아온 내 과거들이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기도 했다.
'다 한다는데, 나도 자연스레 모유수유가 되겠지.'
무지가 가져온 자신감은 당돌했다. 준비한 사람은 걱정이 많아 더 대비를 하고, 준비 없는 사람은 자신감만 넘칠 때가 있는데, 내가 그랬다. 무지함이 가져오는 해맑은 자신감. 아니, 그래도 낙관이라 해볼까. 혹시나 모르니, 나만큼이나 모유수유가 당연히 될 줄 알고 있을 남편에겐 모유수유의 어려움에 대한 풍월을 말을 읊어두는 치밀함은 준비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출산 후, 유축을 해보니 난 철저한 탈락.
"모유는 애피타이저네! 울 아가는 두 개 먹으니 미각이 발달하겠어."
자조 섞인 농담으로 애써 패배감을 자기치유했다. 그래도 모유라는데. 모유를 먹이며 나누는 내 아이와의 교감이 고팠다. 내 아가가 양 볼을 쭉 수축시켜 모유를 빨아 입안 가득 모유 모여 풍요로운 생의 기쁨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걸 나도 어쩔 수 없이 느껴보고 싶었다. 모유의 세계는 언제나 아름답다고 들었으니까. 다만 나는 그 세계에 진입할 수가 없을 뿐. 탈락. 일찌감치 혼합으로 타협할 수밖에.
여전히 희망의 끈을 쥐고 있던 나는 낮이던 새벽이던 3시간 텀으로 아가가 깨기 전 미리 유축을 했고, 아가는 그 바닥에 깔려 몇 번 빨면 없어지는 양을 먹였다. 어느 새벽, 모유를 먹이지 못하고 풀 죽은 채 거실에 나와 유축을 하고 있었다. 너무하다. 오늘은 해도 해도 너무하다. 이건 지금까지 중 가장 적은 양이다. 유축과 함께 오는 패배감에 바닥에 겨우 깔린 내 모유만큼 내 자아도 납작해졌다.
잠귀가 밝은 남편은 거실 소파에 휑하니 앉은 내게 다가왔다.
"이것밖에 안돼. 열심히 했는데, 이게 전부야. 내일 아침은 애피타이저도 안 되겠어. 난 탈락이야."
그 순간 바람을 휘휘 가르고 울창한 숲을 산책하며 기뻐하던 나, 남편과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던 나, 내 일을 치열하게 하며 뿌듯함을 느끼던 나, 읽고 배우며 나를 키워가던 입체적인 나는 없었다. 그 새벽의 소파에는 부족한 기능을 가진 낡은 기계인 듯 납작해진 나만 있었다.
남편은 그런 나를 보고는 완분으로 아이를 키우자고 했다. 지금은 그의 이성적인 현명한 선택에 감사하지만, 그땐 말도 안 된다 생각했다. 난 엄마라면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모유는 엄마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고, 모유를 먹는 아이가 빠는 노력으로 인내력과 두뇌가 발달하고, 엄마와 교감이 이루어지며, 면역력이 생겨 안 아프다고 했다. 모유를 먹고 자란 언니보다 분유를 먹고 자란 내가 더욱 건강하고 잔병치레가 없었지만, 이는 이 세계에서 불문율이다. 아파도, 참을성이 없어도, 공감이 떨어져도 이건 다 모유를 먹이지 않은 탓이다.
출산으로 몇 시간 만에 변해버린 몸과 마음. 처음 겪는 육아의 혼돈과 피로. 아직은 이 아이가 내 아이인가 믿기지 않는 얼떨떨한 시점에 스스로와 주변에서 옭아매는 모성애의 강요. 그중에서 가장 강력한 모성애의 강요가 바로 모유수유다.
초보 엄마와 세상은 물리적으로 보이는 양에 대한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따위의 일은 노력으로, 모성애로 다 이겨내는 거라는 정언명령을 내린다. 그 명령의 무게는 참 힘이 세서 내 아이를 위해 모유를 내어줄 능력이 없다는 데에 미안함이 몰려온다. 그것뿐인가. 왜 나만 안되는가가 가져온 패배감, 노력하지 않았다는 스스로의 책망, 수유로 인한 피로도 함께 밀려온다. 아이가 우유를 게워내면, '모유보다 소화가 안되서일까?' 똥을 하루씩 거르면 '모유수유가 아니어서 그런가?' 이렇듯 육아 무지의 끝은 모유수유이다.
나는 갓 엄마가 되어 또 실수를 했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세상 사람들의 말만 들었다. 내 기능을 살피고, 내 현재를 직시하고, 내 힘듦의 노크를 무시했다. 나는 패배감과 세상 최고로 비논리적인 귀인을 했고, 그 대가로 나는 충분히 기뻐할 수 있는 순간을 걸었다. 무지와 무계획에 휩쓸려가던 내 모유수유에 대한 물길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나는 하루에 3번씩 규칙적으로 불행했으니까. 이건 명백히 오류가 맞다.
누구나 그렇듯 니와 남편은 임신의 처음부터 행복했다. 아이가 다행스럽게 출산되어 더욱 감사했다. 우리가 확실히 계획한 게 있다면 자주 기쁜 육아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우리의 첫 육아는 서툴겠지만 그 서툼을 감사와 행복으로 다독이자 했다. 서툼의 먹구름이 우리의 행복을 잠식하는 꼴을 더는 볼 수가 없었다.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그날부터 나의 아가는 완분으로 키우기로 했다. 부모가 건강하고, 즐겁고, 행복하면 그 기운이 아가에게 전해질 것이 더욱 당연했다. 그리고 대신 더 많이 안아주자 했다.
완연한 분유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나의 아가야. 엄마를 믿으렴. 엄마로 말할 것 같으면 분유 타기에 능숙한, 분유계의 마이스터니까. 나는 이제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기 전에 기분 좋게 따뜻한 온도의 분유를 만들 수 있다. 분유를 타며 오늘은 간의 오각형이 잘 맞기를! 하며 혼자 웃었다. 크림빛 분유를 타서 내 아이를 내 왼쪽 가슴에 폭 안고 먹였다. 나의 아가는 양 볼로 힘껏 빤다. '우리 아가 또 큰다. 우리 아가 잘 큰다.'
그렇게 분유수유를 결정하던 날. 남편은 기념으로 근사한 저녁 식사를 차려주었고, 오랜만에 부부는 와인을 한 잔 했다. 그날 이후, 밤 수유는 남편이 맡았다. 쪽잠을 자던 생활을 해봤기에 나보단 더 익숙한 패턴이고, 내가 밤까지 돌보면 피곤해서 나와 우리 아가에게 더 안 좋다는 그의 배려였다. 분유수유였기에 가능한 분배였다. 나는 모처럼 푹 잠을 잤고, 며칠 후엔 아기의 깨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곤 아침에 말끔히 일어나 아이를 안고 웃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우리의 아가는 하루씩 더 안정되어 갔고, 환하게 웃는 일이 많아졌다. 남편의 이성에 의한 권유와, 밤 시간 육아 전담은 그 순간 이후부터 내겐 큰 고마움이고 사랑이다.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그 마음이 더욱 고마워질 것이 명백하다.
육아는 긴 여행이다. 오늘의 내 육아는 내일을 준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오늘의 행복 그 자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또 어쩌면 가장 아름답고 기쁜 하루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 그 하루들이 내 긴 육아를 채워가기 때문이다. 나는 안다. 행복한 오늘의 내가 내일의 행복한 나를 만든다.
우리 부부는 분유수유를 선택했다. 새로운 선택에는 또 그만의 길이 나 있었다. 나는 덜 피곤했고, 낮에 내 무릎에 내 가슴에 아가를 기쁘게 더 자주 안았다. 덕분에 내 아가가 자주 웃는다. 뿌듯하다. 나는 노력했고, 실패를 알고 받아들이며 선택을 했다. 지금 그 선택에 후회가 없으며 탓을 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오늘이 참 행복하고 즐겁기 때문이다.
모유수유에 대한 나의 실패담. 이는 어쩌면 내 육아의 기조인 즐거운 육아를 위한 행동 중에서 첫 실패이면서, 패배를 받아들이며 중요한 걸 잊지 않도록 새로운 깨달음을 준 승리의 서사이기도 하다. 육아의 세계에서도 길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 것이 하나의 까닭이고, 내 오늘의 육아가 감사와 즐거움이라는 정적 정서로 채우고 있음이 또 하나의 선명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