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기억의 부자되기-새로움과 익숙함을 연결하라

부호화 학습심리 공부법 교육 심리 청소년

by 주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공부합니다. 책을 펼쳐 시험 범위를 눈으로 보고 집중합니다. 눈으로는 글자를 보았고 귀로는 설명을 들었고 손으로 필기하며 집중한 덕분에 공부한 내용이 단기기억까지 잘 도착했습니다. 이제 장기기억(long term memory)으로 옮기는 일이 남았습니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공부했지만, 장기기억에 잘 데려다 놓지 않으면 20초 이내에 잊어버릴 테니까요.


장기기억은 일상적 경험에 관한 기억과 공부로 쌓은 지식이 저장된 기억저장소입니다. 장기기억은 기억을 영구적으로 저장합니다. 살아온 만큼, 공부한 만큼 수많은 정보가 저장된 장기기억, 여러분의 장기기억의 옷장은 어떤 모습인가요?

✔ 계절별, 종류별로 정리된 옷장
✔ 벗어둔 채 쌓아둔 정리되지 않은 옷장

외출을 하려고 작년에 입었던 티셔츠를 입으려고 할 때 원하는 옷을 빠르게 찾아 입을 수 있는 옷장은 어디일까요?


장기기억도 마찬가지입니다. 장기기억 속 기억이 정리되지 않을 때, 필요한 순간 정확한 인출이 어려워집니다. 아무리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공부해도 공부한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시험 때 머릿속에서 정답을 찾기가 어려워 답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설단현상(tip of tongue phenomenon)입니다. 말이 입에 맴돌지만 정확하게 생각나지 않는 현상입니다.


‘아! 있잖아. 그거.’ ‘그게 뭔데?’ ‘아, 지난번에 그거.’
이렇게 ‘그거’라는 단어로 대화를 이어갔던 경험.

“비행기를 탔는데 스튜디오분께 부탁했지.”
“응? 스튜디오? 스튜어디스겠지.”


이렇게 답답하기도 하고 어이없는 웃음이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험지 앞에서는 웃음도 나지 않습니다. 몇 페이지인지, 어느 그림 아래 이 말이 있었는지까지 생각이 나는데 정작 그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 단어시험을 볼 때 외웠던 단어가 생각날 듯 말 듯할 때. 정말 머리에 쥐가 났나 싶죠.


억울한 이유는 하나예요. 공부했으니까요. 알고 있는 내용이니까요. 공부를 안 했거나 모르는 내용이면 억울하지도 않습니다. 설단현상을 막기 위해 우리는 장기기억을 관리해야 합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호화: 새로운 지식은 기존 지식과 연결하라


부호화(encoding)란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을 때 기존에 가지고 있던 배경지식과 연결하려는 노력입니다. 전학 온 친구를 같은 반 친구가 다가가 화장실은 어디인지 급식실은 어디인지 알려줄 때 새 친구는 새 환경에 적응하기 쉽겠죠. 새로운 곳에 여행을 갔을 때도 먼저 다녀온 사람에게 팁이나 맛집정보를 들으면 여행을 즐기는 데 도움이 됩니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을 때 뇌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뇌는 참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을 가졌어요. 이전에 본 적이 없던 새로운 내용이 들어오면 말 한마디 못 걸고 혼자 둥둥 외딴섬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낯선 용어는 외워지지도 않아요. 지금 여러분도 ‘부호화?’ 이게 뭐야! 하실 거예요.


낯선 내용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원래 알고 있어서 친숙했던 정보와 연결 지어주는 겁니다. 예를 들어 ‘hook’라는 단어를 학습할 때, 동화 피터팬에 나오는 후크선장의 손이 갈고리 모양이었던 것과 연결 짓고, 반복되는 음절로 귀를 사로잡아 수능 금지곡으로 불리는 노래를 ‘후크송(hook song)’으로 불렀던 단어와 연결 짓는 거죠. 이렇게 새로운 단어를 기존에 알고 있던 내용들과 연결 지어 다양하게 통합될 때 hook라는 단어는 의미를 갖게 되어 잘 기억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오수벨(David Ausubel)도 새로운 학습내용을 관련된 배경지식과 연결 지을 때 단순 암기하기보다는 의미를 연결 지으며 학습할 수 있다는 유의미학습을 제안했습니다. 한 명 한 명의 소중한 내가 서로 연결 지어 가족, 친구라는 의미를 갖듯, 지식도 서로 연결될 때 의미가 생깁니다.


부호화는 사실 우리 생활 속에 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거 작년에 배웠잖아요?”

이 질문, 왠지 익숙하지 않나요? 이 질문 앞에선 늘 학생들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하죠. 네? 제가요? 언제요? 에이, 선생님 농담도 참. 설마요. 아닌데요. 배운 적 없는데요. 하는 눈빛으로 선생님을 바라봅니다.


선생님의 눈빛도 진심이긴 마찬가지예요. 배웠잖니, 배운 거 맞잖니. 다들 집단으로 결석했니? 하며 바라보시죠. 왜 선생님들께서는 서로 같은 공간,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 질문을 매번 하시는 걸까요? 이제 알아차릴 수 있겠죠. 바로, 오늘 새롭게 배울 내용을 잘 넣기 위해 여러분이 가지고 있던 지식과 연결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새로운 정보는 친숙한 경험이나 배경지식과 만날 때 의미 있고 단단한 학습이 이루어집니다. 또한 연결은 관련된 지식을 함께 구분 지으며 장기기억을 칸 별로 정리해 줍니다. 정리된 장기기억에서 필요한 정보를 찾기란 훨씬 쉽겠죠.


이런 유용한 부호화의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연결 짓기의 비결 1. 조직화(organization)


조직화는 정보를 순서와 위계에 따라 정리하는 방법입니다. 관련 개념 간의 관계를 이은 개념도, 도표, 순서 연결과 같은 방법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대순으로 정리하기입니다. 역사를 배울 때 고조선-여러 나라-삼국시대-남북국시대-고려-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의 순서대로 중요한 사건들을 정리하거나 연표로 정리하는 학습은 각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두 번째는 내용이 가진 포괄성에 따른 개념도 작성입니다. 개념도를 작성하면 개념 간 연결을 더 단단하게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정보처리이론을 소개할 때 감각기억->단기기억->장기기억의 순서에 따라 이동하는 것을 도표를 제시했습니다. 내가 평소 기억했던 순간과 각 명칭을 관련짓고, 이를 도표로 정리하면 하나씩 외우는 것보다 흐름에 따라 내용을 이해하기가 쉬워집니다. 별자리를 배울 때도 하나하나 암기하는 것보다는 봄, 여름, 가을, 겨울철에 따른 별자리를 서로 연결하고, 계절별로 구분하면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하죠.' 북극성은 작음곰자리 꼬리별' 이렇게 연결 짓는 겁니다.


연결 짓기의 비결 2. 정교화(elaboration)


정교화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머릿속 노트정리에 새로운 지식을 붙이거나 수정하며 지식을 확장하는 방법입니다.


영어단어 공부할 때 혹시 오가며 보고 들었지만 단어의 뜻은 정확히 모르는 단어를 단어장에서 보게 된 경험이 있을까요? 학교 앞 편의점 간판에서 ‘GS 리테일’이라는 단어를 자주 보았지만 리테일이라는 뜻은 잘 몰랐는데, 단어장에서 <retail, 소매>라는 단어를 보게 되었어요. 그러면 매일 보던 GS 리테일이 소매점이라는 뜻이었구나 하고 알게 되고, retail이라는 단어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경험과 연결되어 단단하게 기억이 되죠. 낯선 학습내용이 기존의 경험과 만날 때 낯가림보다는 빠른 이해와 기억의 힘을 갖게 되고, 이런 과정을 거칠 때마다 내 머릿속 지식이 촘촘해지고 확장됩니다.


우리의 이해는 부익부 빈익빈입니다. 배경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같은 경험에서도 더 많은 내용을 이해하게 되고, 배경지식이 부족한 사람은 같은 경험에도 더 적은 내용만을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덕수궁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은 전통적인 조선궁궐의 구조를 가진 중화전과 현대식 건물인 석조전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이질적인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에 그친다면, 덕수궁이 대한제국 시기에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의 근대화에 힘쓰고자 했던 염원을 담은 곳이었으나 건물이 완공된 해에 대한제국이 몰락했던 암울함을 담은 건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덕수궁의 아름다움 속에서도 역사적 슬픔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경험한 만큼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인지발달을 연구한 피아제는 충분한 스키마를 가질 때, 유의미학습을 제안한 오수벨은 선행조직자가 있을 때 새로운 정보를 더욱 의미 있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유홍준 선생님께서도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셨죠. 경험한 만큼 세상을 이해한다니, 오늘도 배우고, 돌아다니고, 선택하고, 관계 맺는 경험을 충분히 해야겠습니다.



연결 짓기의 비결 3. 강력한 암기술-의미를 만들어라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방법은 두 음자법과 이야기 만들기가 있습니다.


먼저, 이야기법입니다. 이야기법 중에 가장 간단한 방법을 하나 소개할게요. 여러분은 한라산이 몇 미터인지 알고 있나요? 1950미터입니다. 아마 이렇게 외우면 언젠가 누가 물어볼 때 헷갈릴 거예요. 1850이었나? 하고요. 그렇다면 이런 방법은 어떨까요?


‘한번 구경 오십시오’ -> 약 1950미터


그냥 외울 때보다 잊어버리지 않겠죠?


비슷한 방법으로 조선 전기와 후기를 구분하는 중요한 사건인 임진왜란은 몇 년도에 일어났을까요? 조선 전기 평화로운 200년을 보내며 전쟁에 대한 대비에 소홀했죠.


임진왜란은 '이로구있다’가 1592년에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어 외우면 숫자를 쉽게 잊어버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필요한 순간 이야기가 생각나며 정확하게 인출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아주 강력한 암기 방법인 두문자법(acronym)입니다. 화학 교과에서 원소 주기율표와 같이 여러 낱말을 암기해야 할 때 앞 글자를 따거나 키워드를 따서 외우는 방법이죠. 대표적으로 조선시대 왕 이름을 외울 때 흔히 쓰는 ‘태정태세문단세...’는 잘 알려진 두문자법 암기입니다.


학창 시절에 외웠던 조선시대 왕의 이름을 아직도 태정태세문단세로 외울 수 있는 걸 보면 두문자법은 아주 강력한 기억법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고시에 합격생들도 공부방법으로 꾸준히 제시하는 방법이죠. 다만 두문자 배열을 너무 여러 개 만들면 두 기억이 섞여서 오류가 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낯설고 외워지지 않는 영역에서만 사용하는 것이 정확도와 효율성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강력한 암기술 두 가지 방법이 참 유치하다고요? 기억하세요, 유치할수록 기억은 잘 됩니다. 유치함은 무거운 기억을 가볍게 들어준답니다.


다음엔 장기기억에 들어온 정보를 의미 있게 기억하고 정리하는 두 번째 방법을 만나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