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환경

by 주윤

“남편, 오늘은 부침개 어때? 쪽파에 오징어 넣어서 먹자. 막걸리도 같이 먹을까?”

“좋아. 근데 왜 갑자기?”

“아! 오후에 티브이에서 봤어.”



나는 나비 날개 같은 팔랑거리는 귀와 의심의 무게를 덜어낸 채 가볍게 여기저기에 가 닿을 줄 아는 두리번거리는 눈을 가졌다. 이 여름의 공기 닮아 좀 무게 있으면 좋으련만 내 눈과 귀의 엉덩이는 참 사뿐하기만 하다. 더욱이 무언가가 좋아 보이고 좋다고 들으면 긍정의 눈과 귀는 금세 ‘아! 그래?’ 하고 그 자극들과 와락 손을 잡는다. 마음이나 금전적 준비가 필요할 땐 꽃 중의 꽃 합리화의 시간과 온 우주의 금전을 모으는 시간을 갖기도 하는데, 쉽게 손이 닿는 것에는 황급히 손을 내민다. 그런 것들은 대게 티브이에 부침개가 나왔을 때, 부대찌개가 나왔을 때, 콸콸콸 맥주가 나왔을 때이다. 오늘은 티브이에서 친구들이 나들이를 함께한 후 부침개에 막걸리를 달게 먹는 것을 보았으니, 나의 온 마음에는 둥근 부침개가 떴다.


냉장고엔 이미 운명처럼 쪽파가 있다. 여름의 별미인 초록의 까슬하고 쌉쏘롭한 호박잎 쌈을 먹고 싶어서 곁들일 된장소스를 만들기 위해 샀던 이 쪽파는 어느덧 호박잎은 기억에도 없다. 그저 오늘의 부침개를 위해 존재했던 것만 같다. 어쩜 이렇게 쪽파는 효율이 높을까. 쪽파의 옹골찬 하얀 머리와 날렵하고 매끈한 초록의 잎을 자르는 데 알싸한 수분감에 기분이 좋다. 이 순간 버릴 것 하나 없는 쪽파가 너무나 기특하다.


초록의 생생한 쪽파 한 움큼에 얇게 채를 썬 초승달 모양의 하얗고 투명한 양파, 그리고 열십자 모양으로 칼집을 낸 오징어를 듬뿍 볼에 넣었다. 채소와 해산물이 담긴 파릇하고 둥근 볼에 알싸한 초록의 향이 솔솔 피워 난다. 고소함을 더하기 위해 감자를 강판에 갈아 넣고 달걀도 2개나 넣었다. 마지막은 마법의 하얀 부침가루 솔솔, 묵직한 물을 주욱 넣고 살살 저어주었다. 채소의 알싸함과 곡물의 고소함의 자기주장을 부침가루와 물의 담백함이 조화롭게 섞였다.


그렇게 우리 집 여름 식탁에도 쌉싸름하고 고소한 부침개가 둥그렇게 올랐다. 잠깐 눈으로 보았던 티브이 덕분에 오늘의 저녁 식탁이 고민 없이 해결되었다. 그리고 시원한 막걸리 한잔에 파전 한 입을 먹는 매 젓가락마다 성취감이 함께 두둥실 떠올랐다.

“너무 맛있다. 고소해.”

“티브이 보길 잘했네.”

“하긴, 부인은 티브이에 나오면 먹고 싶어 하잖아.”



오늘 내가 오후에 잠깐 본 티브이에서 김치전이 나왔다면 오늘 메뉴는 어땠을까? 삼겹살에 소주가 나왔다면, 부대찌개에 맥주가 나왔다면, 깍두기 볶음밥이 나왔다면? 저녁 메뉴는 아마 달라졌을 것이다.


그때 옆에 앉아있던 나의 여덟 살이 보였다. 나의 여덟 살의 동그랗고 반짝 반짝이는 두 눈에 나는, 그리고 아빠로서 남편은 어떻게 보일까? 그리고 나의 태도들은 여덟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여름방학이 한창인 지금, 나와 우리 집 여덟 살은 매일 온 하루를 함께 보낸다. 나는 여덟 살보다 살짝 늦게 일어나서는 일어나자마자 시린 눈을 비비며 걸어가서는 여덟 살을 꼭 안는다. 한창 다면체 종이 접기에 빠진 여덟 살은 일상의 포옹에 잠깐 응하고는 곧 종이 접기에 몰두한다. 이렇게 자신보다 늦게 일어나는 엄마를 여덟 살은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엄마의 기쁨이지!” 하고는 블로그를 보고 내가 만들 수 있는 반찬을 열심히 만든다. 더운 여름이어도 불 앞에 서서 멸치를 볶고, 여덟 살이 좋아하는 돼지고기를 노릇노릇 굽는다. 여덟 살이 먹을 수 있는 크기로 자른 김치와 반찬을 접시에 덜어 담아내고 나의 여덟 살이 먹는 모습을 본다. 집에서 내가 할 일을 당연하게 여기고 심지어 열심히 하는 엄마의 태도는 여덟 살에게 어떤 인상을 누적하고 있을까?


여덟 살의 느린 젓가락질과 숟가락을 절반도 채우지 않는 밥의 양이 내 눈에 거슬린다. 스스로 먹도록 기다려주기로 했던 나와의 다짐을 떠올리며 참고 또 기다리는데 서서히 배가 차는 아이의 젓가락질은 더 느려지기만 한다. 식사의 막바지에 결국 나는 여덟 살의 숟가락을 들어 밥을 듬뿍 뜨고 반찬을 한껏 올려 여덟 살의 입에 넣어준다. 이렇게 식사는 마무리되었다. 반갑지 않은 일의 마무리를 도와주는, 아니 여덟 살이 자신의 일을 마치는 것을 나의 편의를 위해 끝내 기다리지 못하고 해결해버리는 엄마의 손길이 여덟 살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여덟 살은 일주일에 두 번, 같은 아파트에 사는 2학년 형과 동네 도서관에 간다. 이 스케줄은 아이의 독서습관을 위해서라기보다 전적으로 내 사심을 채우기 위함이다. 아이가 방학을 시작하면서 봄부터 배워온 수영 레슨에 차질이 생겼다. 어떻게든 수영 레슨에 참여하고 싶던 나는 내가 수영 레슨을 간 동안, 여덟 살을 아는 형과 함께 수영장 근처 어린이 도서관에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아직 어린 두 어린이를 보호자 없이 도서관에 넣어준다는 것이 약간은 불안하기도 했지만, 내가 수영을 계속 배우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이렇게 배움에 대한 욕구에 어느 정도의 위험요소를 감수하는 내 선택과 행동을 여덟 살은 어떻게 생각할까?


여덟 살이 너무나 지루해하는 연산 문제집을 푸는 시간. 여덟 살은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한 문제를 풀다 말고 손에 색종이를 쥐고 있다. 여느 때처럼 시작이 되지 않는다.

“어? 지금 눈과 손이 어디에 있지? 우리 여덟 살! 생각하는 머리 가지고 왔지요?”

나는 가벼운 격려의 목소리를 남기고 부엌으로 살짝 멀어진다.

“엄마는 저녁 준비할 거야. 엄마는 엄마일 열심히 할 거니까, 주윤이도 주윤이 일을 성실히 하는 거예요!”

그래도 아직까지는 괜찮다. 쌀을 씻고, 불려놓은 다음 주윤이를 흘낏 본 순간! 온 세상의 먹구름이 모두 몰려온다.

아. 직. 도. 시. 작. 을. 안. 했. 다!



“김주윤!!!!!!!! 아직도 시작을 안 하면 어떻게 해? 자기 할 일은 제대로 해야지!”

“눈은 문제집! 손은 연필! 머리는 생각! 이렇게 집중해야지!”

“불평하다 보면 언제 끝날 거야? 그럼 엄마도 불평해도 돼? 아! 저녁밥 만들기 싫어! 아! 설거지 정말 하기 싫어! 이렇게 엄마도 불평해도 괜찮아?”


결국 내 몰려온 먹구름은 천둥번개에 국지성 호우를 나와 주윤이에게 잔뜩 퍼부었다. 내 마음도 진정이 안되어 흐리기만 하고, 주윤이의 빨개진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엄마, 지금 저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 못 받게 하려고 그래요? 엄마가 혼내면 저 울잖아요.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 못 받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엄마는 나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게 분명하잖아요. 매일 말하잖아요. 그래서 혼내도 나는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건 아는데 근데 왜 혼내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내가 속상하면 어쩌려고 혼내요?”


해야 할 일인 것에 불평을 한 것도, 딴짓을 한 것도 다 아는데, 그래도 주윤이는 내가 혼내는 게 미웠던 게 분명하다. 그래서 결국 내 탓을 하는 데 산타할아버지까지 오셨다. 이 귀여움의 햇살이 어느새 내 마음의 먹구름을 거두었다. 나는 참을 수 없어 주윤이를 꼭 안아주었다.

“할 수 있겠지? 자기가 맡은 일에 불평하고 딴짓해서 그런 거야. 그것만 아니면 우리 주윤이는 한 문제씩 차근차근 잘 해내잖아. 엄마가 알지. 다시 시작해볼까?”


하기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문제집을 쥐어주고 상냥하게 격려했다가 별안간 찌릿찌릿하게 불호령을 내리는 엄마, 그리곤 갑자기 사랑스럽게 안아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오락가락 엄마를 주윤이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함께 책을 읽기로 하고는 혼자 소파로 가서 책 사이에 휴대폰을 숨겨두고 인터넷 검색을 하는 엄마를 언제 알아차릴까? 등굣길에 늘 서두르라고 채근하면서 아빠와 외출할 때마다 제일 늦게 준비를 끝마치는 엄마를 현관에서 기다릴 때, 주윤이는 등굣길에 도끼눈을 뜬 나를 떠올릴까? 모두가 잠든 새벽 3, 4시까지 강의 자료를 만들며 강의 준비를 하면서도 아침 8시 30분까지 출근을 하는 엄마를 주윤이는 알고 있을까? 매일 아침 주윤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하교시간에 기다렸다가 데리고 나와 간식을 먹이고 학원에 데려다줄 때 운전하는 내 뒤통수를 보고 주윤이는 어떤 생각을 할까?


아니면 이 모든 게 자연스럽고 당연하기에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의 이 태도를 볼 수밖에 없는 주윤이에게 나의 이 태도들은 어떤 흔적을 남길까.


부모는 아이의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환경이다. 환경은 은행나무를 단풍나무로 바꿀 수는 없지만, 같은 은행나무라고 하더라도 어떤 땅에 뿌리를 내렸는지, 얼마나 햇살을 받는지, 어떤 습도에 생장했는지에 따라 가지의 방향과 잎의 빛깔은 미세하게 바뀔 수 있다.


은행나무의 타고난 습성에 적합한 환경에서 자란 은행나무는 건강하고 생동감 넘치는 가지를 제가 타고난 성질에 따라 건장하게 뻗어낼 것이다. 그 가지에 달린 잎도 계절에 따라 연두에서 초록으로, 그리고 환한 전구를 켠 듯한 노랑 잎의 변화를 온전하고 건강하게 겪어갈 것이다. 하지만 타고난 습성을 방해하는 햇살, 습도, 땅에서 자란 은행나무도 가지를 뻗어내고 잎을 틔워내겠지만 그 건장함과 빛깔은 앞선 은행나무와는 다르다. 그 과정마다 은행나무는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과 의구심, 그리고 환경에 대한 불만에 에너지를 쏟느라 자신의 온전한 빛깔을 밝히는 데 쓸 에너지를 소진하게 마련이다.


나는 내가 주윤이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면, 한 가지 행운을 진심으로 바란다. 나라는 환경이 주윤이 본래의 특성과 맞는 환경이었으면 좋겠다. 나라는 환경이 주윤이가 주윤이로 힘껏 살아가는 데에 유익한 온도와 습도, 햇살이었으면 좋겠다.


행운만을 바라고 있을 순 없으니, 오늘도 나는 주윤이를 보아야겠다. 나의 가벼운 눈으로 주윤이의 눈썹의 움직임과 볼의 빛깔, 눈의 동그란 모습이 언제 어떻게 변해가는지 보아야겠다. 나의 팔랑이는 귀로는 주윤이가 하는 말의 높낮이와 크기를 세심히 듣고 언제 주윤이가 편안하고 신나는지, 언제 불편하고 어려워하는지를 인지해야겠다. 그렇게 주윤이를 온전히 경험해야겠다.


주윤이는 성장하는 어린이다. 새로울 수밖에 없는 주윤이의 모습을 늘 낯설게 보고 들으며 주윤이의 변화에 팔랑이는 환경이 되어보리라. 세찬 햇살과 가벼운 바람이 공존하는 여름과 가을 사이의 이음새 같은 계절에 나는 또 이렇게 욕심을 잔뜩 부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