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부르셨나요? 마흔 살 수영꿈나무!

by 주윤

참 신기한 일이다. 수영 강습을 가는 날, 더 이상 내 마음이 내 발을 붙잡지 않는다. 언제나 수영 시작 10분 전까지 가지 말까?를 불러일으키고 스스로 워워~하며 다스려야 했던 그 귀찮음이 사라졌다. 별안간 무슨 일인지 귀찮음이 열의로 바뀌었다.

‘좀 일찍 가서 강습 전에 연습하면 더 잘하겠지!’



덕분에 나는 강습 직전에 도착하던 지각생에서 강습 20분 전에 도착한다. 발차기 한 바퀴, 자유형 한 바퀴를 하고 나서 심장의 펌프질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이러다 정작 강습시간에 다리가 무거워져 조퇴해야지 싶을 지경이다.



나는 이제 상급반! 접영을 배운다. 누군가들에게 수영의 꽃은 무엇? 하면 접영! 하겠지. 그 꽃은 참... 만나기가 힘들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겠지만, 접영이라는 꽃은 그렇게 요원하기만 하다. 멀고 또 멀다.


수영 앞에 늘 겸손한 나는 접영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접영 앞에만 서면 자아가 콩만 해진다. 웨이브요? 가슴을 숙였다가 부드럽게 펴면서 물속을 쭉 뻗어나가라고요? 그게 뭔가요? 그게 되는 몸과 안 되는 몸은 남과 여가 나뉘듯이 이미 구분된 것이 아닐까요. 나는 일생을 유연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내 몸이란 바로 서면 I, 구부리면 V가 되는 것이지 S는 가당치도 않다. 내 몸의 사전엔 U나 S가 존재한 적이 없다. 내 몸에 S라는 유연성을 가지려면 나는 분명히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접영 25m 가실게요!”

오! 노! 내 차례이다. 오늘도 출발선에 섰다. 설 수는 있다. 가는 것을 못할 뿐. 내가 다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이곳의 공기, 이곳의 물, 이곳의 구체적 요구에 맞지 않을 뿐. 그래서 슬픈 일이 된다. 더욱이 내 수영복은 너무 잘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이 불일치도 참 서글프다.



오늘은 어떻게든 팔을 돌려보리라! 각오를 다지고 발바닥으로 벽을 있는 힘껏 밀고 물속으로 쓰윽 들어갔다. 발 한번 차고, 웨이브 한번 들어갔다가 지금! 팔을 돌려야 해! 그리고 머리를 물 밖으로!


일단 물 밖으로 나오긴 했는데 다시 냉큼 물에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아니 이미 몸은 급해서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아니, 움직였다기보다는 중력의 끌어당김에 머리와 몸은 황급히 물속으로 급 하강했다는 것이 맞다. 급히 머리를 넣다가 물을 한 입 가득 먹었다. 이미 내 발도 멈춰있다. 그동안 물을 좀 안 먹어서인지, 오랜만에 물을 먹으니 자괴감이 든다.



‘아. 물을 먹다니.’

‘과연 나는 이 상급반에 있을만한 실력인가. 다음 달에 상급반을 다시 복습해야 하는 거 아닐까.’

‘되게 못하네. 그래도 나 체력장 특급이었는데.’


그렇다. 십 대 소녀시절 나는 체력장 특급이었다.

“아니, 특급 아래 등급이 또 있어?”

하며 너스레를 떨던 나였는데, 마흔인 지금 나는 수영 열등생이다. 과연 그때 수영도 체력장 종목에 있었다면 난 특급이 될 수 있었을까? 콩알만 해진 수영 효능감을 가진 나는 십 대 시절의 내 찬란한 기억까지 의심한다. 아니야. 그러지 말자. 좋았던 기억은 지켜주자.


생각해보면 그때도 나는 버티기로 점수를 받았었다. 목이 말라버려서 회색의 모래 맛이 나고 심장이 얼굴에서 뛰는 것을 느끼면서도 오래 달리기를 끝까지 버텼다. 오래 매달리기를 할 때는 덜덜 떨리는 팔과 빨갛게 달아올라 부풀어 오르는 볼을 모른척하면서 철봉을 끝까지 붙잡아 악으로 버텼다. 윗몸일으키기를 할 때는 얼마나 반동을 주었는지 아마 허리가 톡 끊어졌다가 끝나면 곧바로 딱풀로 겨우 붙여둔 것 같았다. 이 버티기 종목들에서 나는 만점을 받았다.



하지만 몸의 근력과 기능은 참으로 겸손한 수준이었다. 던지기는 힘껏 던졌을 때 16m였다. 이름 탓에 10년 동안 1번을 했던 나는 먼저 던지고 나서 친구들의 공을 받아주곤 했는데, 17m 기록의 공을 받으며 알았다.

‘아, 나 되게 못 던졌구나!’

더욱이 유연성 체크는 말도 안 된다. 아니 다리보다 팔이 짧은데, 어떻게 앉아서 팔을 쭉 뻗어 다리보다 더 길게 팔을 늘릴 수 있겠는가! 이건 신체구조 상 불가능한 거 아닌가!


줄넘기도 마찬가지였다. 오래 하는 것은 자신 있었다. 새벽마다 아파트 1층에 내려가 줄넘기 연습을 했다. 숨을 참아가며 모둠발 뛰기 500개, 800개를 연속으로 할 수는 있었다. 내 줄넘기의 세계는 모둠 뛰기, 그리고 좀 더 하면 구보 뛰기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난 여기에 더해 엑스자 뛰기라는 장기 하나 정도 가볍게 장착했다. 내 줄넘기의 세계에서 나는 충분히 줄넘기를 잘했다. 그러다 고2 때 2단 뛰기 미션이 제시되었다. 내 줄넘기의 세계를 뛰어넘는 기술의 추가에 나는 그때 내 체육 인생을 깔끔히 접었다.


그래도 나는 체력장 특급이라는 과거의 영광을 가진 사람인데, 수영 요놈! 어떻게 이렇게나 못할 수 있지? 십 대 소녀시절과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달라진 걸까.



나이 탓... 을 좀 하려다가 주위를 둘러본다. 오전 수영 강습 시간, 레인 가득 나보다 나이가 많은 중장년층,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의 그 광활한 어깨가 수면 위에서 오르내린다. 나이로 쉽게 합리화해보려다가 양심상 이건 아니지 싶다.



그렇다면, 체력장 특급 소녀는 어떻게 수영 열등생이 되었는가!


잘하고 싶은 욕심. 열의? 그리고 연습!


맞다! 그때 나는 스스로 체육을 잘한다고 생각해서 더 잘하고 싶어 욕심을 냈었다. 난 4학년 때 처음 반별 달리기 계주 대표가 된 이후 졸업 때까지 대표였다. 이때의 영광은 초등학교 졸업앨범 행사사진에 빨간 얼굴로 배턴을 받으려 입을 앙당문 어린이 사진 한 장으로 찬란히 박제되어있다. 처음 달리기 대표가 된 이후엔 내가 달리기를 잘한다는 생각과 대표를 유지하고 싶은 욕심에 더 연습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달리기를 잘하는 아이가 되었다. 나는 나의 욕심, 주변의 기대를 알고 내 차례가 되면 이를 꽉 물고 가슴을 펴고 볼이 빨개지도록 달렸다.



초등학교 시절 체육에 대한 자신감은 중학교 때 체육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어떻게든 달리기 종목에서 16초의 벽을 깨고자 힘껏 뛰었다. 나는 나에게 달려드는 공기에 찰싹찰싹 맞아 빨개진 두 뺨이 자랑스러웠다. 농구를 배울 때 레이업 슛의 스텝과 슈팅을 성공하기 위해 기능이 떨어지는 팔다리의 협응을 맞추고자 시간이 날 때마다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나는 체육을 잘하니까. 그리고 잘하고 싶으니까.



나는 지금 이미 졌다. 나는 장난스레 수영을 못한다고 말한다.

“에이~못하지. 못해. 나 원래 뻣뻣하잖아.”

겸손 반, 배우는 자세 반으로 했던 이 말은 내게 그대로 스며들었다. 나는 이제 나 스스로도 인정해버렸다. 나는 수. 영. 을. 못. 한. 다. 더욱이 나는 이 상황에 적응해버렸다. 적당히, 취미 정도로 할 거니까. 하고 합리화도 해놓았다. 나는 스스로를 절대 수영을 잘할 수 가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놓았다.



배움에는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한 알아차림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못한다는 것에 대한 굴욕이 의미 있기 위해서는 잘하려는 욕심과 의지가 있어야만 한다. 나는 그게 부족했다. 잘하려는 욕심과 의지. 그리고 집중과 노력.



월, 수, 금. 10시 30분. 8월의 수영장에는 체력장 특급 소녀가 수영을 한다. 난 이제 물살에 맞아 볼이 빨개지고, 심장이 얼굴에서 뛰는 것을 온몸으로 경험할 마흔의 수영강습생이다. 나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아주 많아서 선생님의 설명, 나의 발차기, 호흡, 팔 돌리기에 진심과 욕심을 잔뜩 부릴 것을 다짐한다. 그리고 될 때까지 오래도록 계속 연습할 것이다. 나는 내가 버티기를 잘한다는 것을 안다.



나의 수영 효능감은 지금 콩알만 하다. 그래서 나는 수영의 하루들에 진심으로 욕심을 부려서 알뜰히 모으고 잘 버티려고 한다.



이미, 내 수영복은 외형상 잘하는 사람처럼 보이기에 충분하므로, 준비는 끝났다. 내가 팔을 돌리고 발을 찰 차례만 남았다.



나는 오늘도 자그마한 효능감 콩알을 튼튼하게 키우며 성장하는 마흔의 수영 꿈나무이다.

(꿈나무라니, 좀 신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