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cm의 폭설이 내린 오늘 아침, 온 세상을 덮을 만큼 수북이 쌓인 눈만큼 내 마음도 걱정이 덮인다. ‘오늘 안에 학교를 갈 수 있을까?’ 엄마 아빠처럼 초등학교 때 한 번도 결석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가진 주윤이의 등교를 위해서는 여러 챌린지를 완수해야만 한다. step1 경사진 아파트 입구를 무사히 빠져나가기. step2 도로에서 앞 차를 꽁! 받지 않기. step3 내 뒤차와 옆 차도 나를 잘 비켜주기. step4 학교의 경사로 통과하기, step5 이 모든 과정에서 할. 수. 있. 다! 의 낙관을 외치며 길을 다시 되감아 집에 도착하기.
이 챌린지들을 과연 하는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을까. 과연 평소보다 몇 배의 시간이 걸릴까. 나의 후덜 거리는 다리를 배려할 여유라고는 없어 보이는 이 정도의 눈이면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하교하는 주윤이를 데리러 집을 나서야 할 것이 분명하다. 이미 내 걱정은 눈 길에서 덜덜 떨며 브레이크에 발을 대기만 했다가 어이쿠야! 하고 황급히 떼느라 무거워진 내 발보다 무겁고, 운전대를 잡느라 힘이 잔뜩 들어간 어깨보다 높이 쌓여간다. 집을 나서는 순간, 지금도 쏟아지는 눈은 더 이상 낭만이 아닌 내가 정복해야 할 태산이고, 챌린지이고, 적이다. 곳간에서 인심이 나듯 빠듯한 챌린지 앞에 낭만은 없다.
마음 단단히 먹고 주윤이와 집을 나섰다. 차를 예열시키고 출발한다. 신생아를 만지듯 조심스럽게 브레이크에 발을 대었다 떼었다를 여러 번, step1을 통과했다. 휴. 이제 step2로 진입한다. 그때 ‘띠링!’ 신호대기 중에 도착한 주윤이 학교의 e-알리미를 체크해 본다.
‘긴. 급. 휴. 교!’
예상치 못한 사건은 우리의 하루를 바꿔놓았다. 내 마음에 잔뜩 쌓인 걱정에 햇살이 비춘다. 눈이 오면 다 무죄이고, 눈이 오면 다 째도 된다. 그렇지, 그렇지!
“주윤아! 오늘 학교 휴교래. 집에 가자!”
“어? 안 되는데요. 오늘 재능발표 제 차례잖아요.”
“월요일날 하겠지. 오늘은 봐,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잖아. 집에서 안전하게 쉬고, 놀자!”
“오~ 월요일! 히히히.”
그제야 주윤이 얼굴에 배시시 미소가 담긴다.
“엄마! 오늘 이글루 만들어야지요! 눈 놀이 해야지요! 에헤헤~”
‘심장아, 진정해. 방심하면 끝이야.’ 나는 내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무거운 챌린지들이 흔적 없이 승화해버린 탓에 같이 승화하며 날아가려는 듯한 나의 마음을 황급히 붙잡아 땅에 붙여놓았다. 끝까지 끝난 게 아니다. 집에 가야 끝이 난다. 나는 다시 이렇게 소중한 물건이 있느냐는 듯이 조심스럽게 브레이크와 엑셀에 발을 붙였다 뗀다. 지하 주차장에 들어오니 안심이 된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조심스럽게 주차를 했다. 오늘은 더욱 벽에 바짝 붙여 주차를 해냈다. 세이프!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무거운 외투를 벗고, 가벼운 일상복으로 환복을 했다. 나는 커피를 내리고 클래식 FM을 틀었다. 라디오에서는 헨델과 잔잔한 캐롤이 울려 퍼지며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있다. 창 밖엔 하얀 눈이 내린다. 커피에 케이크를 한 잔 놓고 내리는 눈을 본다.
‘아. 름. 답. 다.’
내 마음의 곳간에도 하얀 눈만큼 여유가 쌓인다.
“주윤아, 눈 오니까 좋다. 그치? 아빠도 오늘 2시까지 하고 일찍 오신대.”
“아빠 오면 이글루 만들러 가는 거 알지요?”
나도 주윤이도 이제 2시만 기다린다. 이제 눈은 우리 편이 확실하다. 우리의 눈 놀이를 위해 듬뿍듬뿍 내려주고 있다. 어쩜 이렇게 우리 마음을 알았나 싶다. 눈은 가만히 있는데 내 마음이 변한다. 내 마음은 눈을 한 순간 적에서 내 편으로 여길 만큼 가볍디 가볍다.
남편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고, 우리는 여전히 내리는 우리의 편인 눈의 수호 아래 모래놀이 삽과 김치냉장고용 김치통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땅에 수북하게 쌓인 고운 눈을 김치통에 꼭꼭 눌러 담고 뒤집어 통을 살살 들어 올리면 네모진 하얀 눈 벽돌이 만들어진다. 나는 허리를 굽혀 하얀 눈 벽돌을 구워내면, 남편이 벽돌을 아치형으로 쌓아 올린다. 주윤이는 삽으로 뜬 눈을 손에 쥐고 눈 벽돌과 눈 벽돌 사이의 틈을 메꾼다. 그렇게 우리 셋은 펑펑 내리는 눈 아래에 반듯하고 둥근 이글루 집을 지었다.
이상하다. 춥지 않다. 발도 시리지 않는 데다 심지어 몸이 따뜻하다. 남편이 던진 눈에 이마를 정통으로 맞고 머리에 얼음이 붙은 게 분명한데도 웃음이 난다. “으아아아!” 소리 지르는 주윤이의 목소리는 맑고 하얗다. 주윤이는 눈 밭을 뛰어다니느라 손에서 열이 나고 소리 지르고 웃느라 바쁜 입은 닫힐 줄 모른다. 나는 눈을 빚어 뛰어다니는 주윤이를 맞췄다가, 나를 맞춘 남편을 정조준한다. 우리 셋은 이 순간 하얀 바보다. 맞아도 웃고, 안 맞아도 웃는다.
주윤이는 일기를 썼다. 오늘 선생님께서 내주신 일기 주제는 ‘여덟 살 여러분의 꿈은?’이다. 주윤이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지막 문장을 적는다.
“직업은 정하지 못했지만, 지금처럼 살고 싶어요.”
눈이 내리면 사소한 소란은 그게 중요했나 싶게 하얗게 덮어진다. 하얀 눈 아래 마흔의 엄마도 여덟 살의 주윤이도 하얗게 덮어진다. 젊어지는 마법의 물약인듯한 하얀 눈을 맞고 웃으며 뛰어다니는 순간, 우리는 마흔도 여덟 살의 경계도 하얀 눈에 덮인다. 눈을 맞고 뛸 수록 우리에겐 가볍고 하얀 어린이의 명랑함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