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도 여러 부캐 중 대표적인 것, 아니 아이의 본캐는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Homo rudens)이다. 놀이는 중력처럼 강력한 힘으로 아이가 어느 방향에, 어느 곳에 있어도 아이를 아이답게 끌어당긴다. 아이는 그 덕에 마음에 즐거움과 유희를 안정적으로 담고 살아간다.
엄마는 초등시절 시계 보는 법과 시간 계산을 배웠다. 더욱이 엄마는 사춘기 시절에 이르러 전두엽이 발달해 버렸다. 그 덕에 다가올 미래를 예상하여 목표를 세우고, 지금 내가 할 일을 판단하고 계획하는 능력이 생겼다. 이 능력은 내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삶의 목표를 세우고 이루어가는 데 유용했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삶의 모든 기술은 양날의 검이다. 아이를 기르는 데에 이 능력은 나와 아이의 차이를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엄마는 눈앞의 즐거운 놀이와 유희를 보는 눈이 흐려졌다.
계획적 삶의 기술이 엄마라는 역할과 만났을 때, 엄마는 강력한 부캐를 갖게 된다. 바로 걱정하는 인간이다.
세상은 위험한 것 천지인데, 내 아이는 아직 깎이지 않은 말랑말랑한 탱탱볼 같다. 주위를 아랑곳 않고 어디로든 굴러가버릴 것 같고, 딱딱하고 뾰족한 세상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말랑한 아이의 발과 볼이 닿아 상처가 날 것만 같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도 말한다.
“차 조심해야 해.”
“운전 조심해.”
얼마 전 티브이에서 전현무 씨는 지금도 어머니께서 육교로 건너라고 당부하신다며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엄마는 그렇다.
이렇게까지만 하면 웃을 수 있다. 이런 걱정과 잔소리는 돌아서면 따뜻한 염려와 돌봄으로 마음을 데워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걱정하는 인간인 엄마는 이 부캐로 또 하나의 부캐를 얻게 되는 데, 그것은 재촉하는 인간이다.
재촉하는 인간인 엄마에겐 직진뿐이다. 특히 등교나 학원 수업을 위해 집을 나서야 할 때, 엄마의 마음은 아우토반 위에 있다. 등교까지는 30분이 남았고, 집에서 출발하면 15분이 걸리니까 이 닦고 옷 입는 데 15분 남았다. 중간에 지체할 시간 따윈 없다. 앞으로의 계획이 눈에 보여 시간이 타이트하다.
하지만 말랑말랑한 탱탱볼 같은 내 아이는 현재의 놀이가 곳곳에 보인다. 분명히 지금 당장 오른쪽으로 가야 하는데, 그 자리에 멈춰서 보도블록 색깔이 재미있어 한참을 볼 수밖에 없다. 지금 곧장 앞으로 가야 하는 데, 뒤로 가서 까르르 까르르 통통통 점프놀이를 하는 게 당연하다. 이 순간 아이는 눈앞의 즐거움의 중력에 진심으로 응답하고 있다. 시간도 장소도 계획도 잊고 오직 놀이와 아이만 있다.
그 순간, 걱정하는 동시에 재촉하는 엄마도 진심이다. 복장이 터진다. 천불...! 물론 처음엔 좋게 말했다.
”주윤아, 엄마가 20분 남았다고 했지? 서둘러야 해. 안 그러면 엄마 마음이 급해져서 화가 나. “
“네!”
하고 주윤이는 배운 대로 양말에 내복 밑단을 넣어 신고 바지와 스웻셔츠를 입었다. 나는 주윤이 학원 가방을 챙기고, 차에서 먹을 바나나와 멸균우유를 한 팩 챙겼다. 됐다!
“주윤아! 마스크 끼고 가자!”
뒤돌아본 주윤이는 마스크 쪽으로 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오전 내내 엘리베이터가 있는 주차장을 만들 거라고 잔뜩 잘라놓은 상자 앞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작업하던 조각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 내 화도 뻗쳐나갔다.
“김주윤! 뭐 하는 거야! 엄마가 지금 시간이 없다고 했지? 꼭 엄마가 마스크 쓰고 신발 신으라고 말해야 해? 바로 가야지!”
걱정과 재촉은 화가 되어 주윤이에게 꽂혔다. 차 안에서 주윤이는 내내 말이 없다.
“주윤아, 노래 들을래?”
“아니요. “
“주윤아,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엄마가 아까 나한테 화냈잖아요. 기분 나빠요.”
“주윤아, 엄마가 미리 20분 남았다고 말했잖아. 그러면 주윤이도 걸리는 시간 생각해서 바로 준비할 때도 되지 않았어? 안 그래?”
“네. “
짧은 대답을 끝으로 주윤이는 입을 닫았다. 그래도 학원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나쁜 기분으로 보내기는 마음이 안쓰러운 나는 주윤이를 달랬다.
“주윤아, 미안해. 엄마가 급해서 그랬어. 화 풀어. 다음엔 좋게 말할게.”
“엄마, 오늘 자유형 성공 파티는 취소할 거예요.”
“왜애~주윤아, 이따가 엄마가 케이크 살게. 기분이 점점 좋아질 수도 있어. 화 풀어. “
주윤이 콧잔등과 눈 가에 분홍빛 꽃물이 든다. 동그랗고 큰 눈에 눈물이 쓱하고 옅게 차오른다. 내가 사과를 하고 달래주니 서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아직은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게 차 문을 열고 주윤이는 내렸다.
학원 앞에 잠시 주정차를 하고 차를 빼야 했던 나는 눈물이 그렁한 주윤이 뺨 한 번을 다정하게 만져주지 못했다. 그게 참 미안했다. 울렁이는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은 나는 동네에서 치즈케이크가 맛있다는 가게에 갔다. 크래커에 크림치즈를 발라먹는 것을 좋아하는 주윤이는 하필 지난밤에 크림치즈가 없어 크래커만 먹어야 했다. 나는 주윤이의 납작해진 마음을 보드랍게 달래줄 크림치즈를 사서 주윤이를 기다렸다.
학원이 끝난 시각, 조금 걸어가야 하는 공용주차장에 차를 주차해 두고 학원 앞에서 주윤이를 기다렸다. 저 멀리 학원 복도에서 주윤이가 나온다. 나를 보고 웃는다.
“엄마!!!”
“주윤!!”
달려 나오는 주윤이가 품 안에 쏙 들어온다. 우린 포옥 서로를 껴안고 손을 잡았다.
“오늘은 어땠어?”
“굿!”
주윤이의 표정과 목소리는 주윤이 특유의 명랑함과 생생한 경쾌함이 피어올라있다. 혼이 나도 이내 나를 밝게 대해주는 이 성격은 내가 주윤이에게 배우고 싶은 면이다.
“주윤! 엄마가 치즈케이크 샀어. 이따가 파티하고 나서 크래커에 발라 먹으면 정말 맛있겠지!”
“네!!! 집에 빨리 가요!”
우리 셋은 보름달처럼 둥글고 노릇노릇한 치즈케이크에 둘러앉았다.
“주윤아, 파티하자! 자유형 승급파티!”
“잠깐만요!”
주윤이는 오늘 자유형을 성공해서 받은 승급증을 케이크 앞으로 가져온다.
“엄마, 이게 있어야지요. 정말 어렵게 했잖아요.”
“맞아. 주윤이가 팔 돌리기가 잘 안 되는데 그거 고치느라 정말 노력 많이 했잖아. “
“맞아요.”
“그러면, 시작하자! 승급축하합니다! 승급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주윤이, 자유형 승급축하 합니다!”
걱정하고 재촉하는 인간과 놀이하는 인간은 다행히도 둥근 케이크 앞에서 같은 마음이었다. 결국, 정답은 언제나 그렇듯 사랑이었다.
우린 지금 서로 다른 인간으로 함께 살고 있기에, 각자의 방향이 다를 땐 쾅! 하고 충돌한다. 하지만 또 함께 살고 있는 호사를 누리고 있음에 자주 기쁜 순간을 누린다.
다만, 한번 구겨진 종이는 다시 펼 수는 있지만 펴고 난 자리에 구겨진 흔적이 남는다. 걱정하고 재촉하는 내 마음이 화가 되어 놀이하는 게 당연한 주윤이의 마음에 닿아 그을음을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는 걱정하고 재촉하는 인간에서 멈추길 바란다. 엄마라고 해서 화내는 인간이 되지 않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윤이는 놀이하는 인간이 당연하다는 것. 사실, 그 놀이하는 주윤이의 맑은 경쾌함을 가장 사랑하는 것도 나였음을 기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