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정당!
인터넷을 통해 열람할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에서 희정당을 검색창에 넣으면 희정당(熙政堂) 4617건, 국역 2310건이라고 나온다. 국역된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창덕궁 1281건, 경복궁 1233건, 비슷한 역할을 했던 경복궁 강녕전 198건, 교태전 82건, 창덕궁 대조전 100건이다.
다른 전각을 다 확인해 봐야겠지만 중요 전각을 검색한 결과 희정당의 언급이 가장 많다. 많이 언급되었다는 것은 왕이 거처하는 곳(연거지소라고한다)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사관들이 작성한 승정원일기를 바탕으로 한다. 왕의 공적인 행위시 2명의 사관이 함께 한다. 한 명은 왕의 말을 적고, 한 명은 행동을 적는다(묘사). 희정당이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많이 등장한다는 것은 조선의 역대 왕들이 공적인 일을 하는 장소로 가장 많이 사용했다는 것이다.
희정당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연산군 때이다. 숭문당(崇文堂)이 화재로 인해 중건을 하게 되는데 숭문당 대신 희정당(熙政堂)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그 후 모든 궁궐이 그렇듯이 임진왜란으로 중건, 인조반정으로 중건, 순조 때 중건되었고, 마지막으로 1917년 화재로 소실된 후 1920년 경복궁 강녕전(康寧殿)을 헐어다가 중건한 것이 오늘날의 희정당이다.
희정당은 본래 정면 5칸 측면 3칸 건물(15칸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정면 11칸 측면 5칸 건물(55칸 건물)이다. 15칸 건물 터에 55칸 건물이 들어서다 보니 건물이 자리 잡은 형세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비좁아 보인다
강녕전의 넓은 월대가 사라지고 5층의 기단과 계단이 남아 있고, 무량각이었던 지붕에 용마루가 생겨났다. 남행각 부분에는 마차나 자동차를 이용하기 위해 변형된 모습을 보인다. 앞으로 툭 튀어나온 모습이 특이하고 기둥에 낙양각이 화려하게 놓여있어 사진 찍는 사람들로 항상 붐빈다. 가장 눈에 거슬리는 것은 사라진 월대 자리를 잔디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식이다. 빨리 제거되어야 할 부분이다.
희정당은 정면에서 접근할 수 없다. 도둑질(?) 하듯이 뒤로 돌아가 개방된 뒤쪽 툇간(복도)에서 내부를 부분적으로 볼 수 있다. 55칸 건물 중 4면의 툇간에 해당하는 곳을 통로(복도)로 만들었다. 실제 사용하는 공간은 27칸으로 중앙의 3칸 응접실, 서쪽의 3칸은 회의실, 동쪽의 3칸은 창고로 사용되었다.
개방된 툇간을 통해 중앙의 응접실을 볼 수 있는데 가구나 바닥은 서양식이고 천장은 전통방식이다. 양쪽 벽면에는 김규진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총석정절경도>와 <금강산만물초승경도>가 자리 잡고 있다. 동쪽의 창고는 거의 보이지 않고, 서쪽의 회의실은 서양식 가구와 천장을 하고 있다.
희정당 건물을 전체적으로 보면 5단의 기단 위에 선 55칸 건물로 겹처마 팔작지붕에 이익공 공포를 둔 건물이다. 지붕의 동서 합각벽에 새겨진 길상문 강(康)과 녕(寧)은 이것이 경복궁의 강녕전 건물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선정문에서 희정당으로 가는 계단, 희정당 남행각
선정문을 나와 계단을 오르면 희정당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고, 남행각으로 이어진다. 남행각 출입구(현관)는 막혀있다. 사진찍고(대부분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선정전과 희정당 사잇길을 이용해 돌아가야 희정당 뒤쪽에 갈 수 있다.
희정당 현관
가마나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게 길이 마련되어 있다. 전통방식은 아니다. 경복궁 안에 있는 고궁박물관 지하에 가면 순종이 이용했다는 자동차가 전시되어 있다. 그 자동차가 지나던 자리겠다.
안쪽으로 희정당 현판이 보인다. 전각에 들어가는 문에도 '인정전의 인정문', '강녕전의 향오문' 이름이 있다. 그러나 희정당의 입구는 문이 아니라 현관이다. 현판이 없다. 들어갈 수 없다.
기둥에 놓인 낙양각이 화려하다. 앞에 보이는 계단에 앉아 멀리 희정당이 보이도록 기념사진을 찍는다. 일명 포토존.....
희정당
경복궁의 강녕전을 옮겨다 지은 건물이다. 강녕전은 넓은 월대를 지니고 있었다. 월대는 사라지고 뜬금없이 잔디가 깔려있다.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이다. 조선은 궁궐 안의 전각 앞에 잔디를 심지 않았다.
현관이 역할을 못하니 돌아가야 한다. 관람로가 서쪽으로 안내되어 있다. 돌아가다 보면 먼저 들렸을 선정전이 담 너머로 보인다. 안에서 보는 것보다 청기와와 다포 계열의 공포가 더 잘 보인다.
선정전을 둘러보는 사람들은 일본인 단체 관광객들이다. 정말 궁금하다 해설사가 뭐라 설명을 하는지..... 일본과 중국 단체 관람이 많은 날이었다.
선정전과 희정당 행각 사잇길로 가다 보면 잔디를 입은 넓은 터가 나온다. 동궐도를 찾아보니 선정전 뒤쪽으로 '보경당'이라는 전각이 있고 희정당과 대조전으로 이어지는 행각들이 자리 잡고 있다. 통로 역할을 했던 행각이 사라진 자리 같다.
동궐도를 보면 궁궐 안의 거의 모든 건물이 행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많은 전각들이 사라진 것이다. 현재 희정당과 대조전도 행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동쪽(창고) 중앙(응접실) 서쪽(회의실)
창고로 사용되었던 동쪽의 3칸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붉은 카펫이 눈에 들어온다. 가구나 바닥은 서양식이나 천장은 전통의 소란반자이다.
고개를 쭉 뽑아 안간힘을 쓰면 서쪽 회의실 내부가 살짝 보인다. 서양식 가구가 놓여있고 천장도 서양식이다.
중앙(응접실)
중앙(응접실)
1920년 순종의 명을 받아 김규진이 그린 <총석정절경도>와 <금강산만물초승경도>가 양쪽에 놓여있다.
선평문과 대조전
희정당 기단 위에서 뒤돌아보면 선평문과 대조전이 보인다.
희정당에서 대조전 남행각으로 이어지는 행각(통로)
희정당 사방의 툇간이 통로(복도)로 이용되었다. 툇간 1칸을 이용해 사방에 이런 식의 통로가 만들어졌고, 이 통로는 희정당 주변의 행각과 뒤쪽의 대조전으로 이어져 있다.
희정당 앞 공간
희정당 동쪽 행각 밑에 공간이 있다. 이곳에서 희정당 앞 공간을 볼 수 있다. 잔디가 깔려있고(웬 잔디!) 웬 굴뚝! 도 놓여있다.
희정당 앞 공간
5층의 기단 중 첫 번째 기단이 땅속에 묻힌 곳도 보인다. 넓었던 강녕전의 월대 대신 놓인 계단이 초라해 보인다.
희정당 지붕
희정당의 겉모습은 겹처마 팔작지붕을 이익공 양식의 공포가 떠받치고 있는 형태다. 용마루에서 내림마루, 추녀마루로 이어지는데 측면에서 보면 삼각형 모양이 생긴다. 이를 합각이라고 한다. 합각벽에 여러 문양을 새겨 넣었는데 희정당은 길상문을 새겨 넣었다.
팔작지붕의 합각
합각의 길상문
강(康), 녕(寧)이라는 길상문이 새겨져 있다.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을 옮겨다 지은 증거다.
희정당 남행각 현관
희정당 남행각 현관
희정당을 나오는 길에 돌아본 희정당 현관은 여전히 포토존 역할을 하고 있다. 한복을 입은 외국인들의 사진 찍기가 진행 중이다.
희정당 앞 전경
동궐도를 확인하면 이곳에도 전각과 행각이 꽉 들어 차 있다. 전각은 간데없고 잔디와 소나무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희정당은 왕의 연거지소로 가장 오랜 기간 사용된 전각이다. 당연히 많은 왕들의 행적과 사연을 지니고 있는 장소다.
희정당과 인연이 가장 많은 왕은 현종이다. 종기와 눈병을 달고 살았던 현종은 거의 매일 같이 희정당에 나와 침을 맞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종이 경복궁 완공 전까지 머물렀고, 효명세자가 죽은 장소이자, 효명세자의 빈이었던 신정왕후(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던 곳이기도 하다.
효명세자 이야기
효명세자는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순조가 태어난 것은 단순히 왕자 하나가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현종과 현종의 정비 명성왕후 김씨가 숙종을 낳은 이래 150년 만에 정비(정식 왕후)가 왕자를 낳은 것이다.
이 기쁨을 "원자가 태어 날 때 오색 무지개가 원중(苑中)에서 일어나 묘정(廟井)으로 뻗쳤으며 소나기가 내리고 우레 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이가 고고성(첫 울음)을 터뜨리자 하늘은 즉시 개이고 궁전의 기와에는 오색 기운이 감돌았다" 고 전한다.
"순원왕후 김씨가 아기를 낳기 전 용꿈을 꾸었는데, 원자는 이마가 튀어나온 귀상인데다 영기 어린 용안을 지녔고, 궁인들은 아기가 정조를 닮았다고 수군거렸다." "순조는 크게 기뻐하며 그날로 원자로 삼았다." 등의 이야기도 전해진다.
축복 속에서 태어난 효명세자는 무기력한 아버지 순조와는 다르게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며 성장했다. 1827년 2월 순조로부터 대리청정을 명받고 실질적인 왕 역할을 수행하며 세도정치의 실권자들을 긴장시킨다. 하지만 대리청정을 맡은지 3년 3개월이 지나는 시점에서 각혈 후 일어나지 못하고 죽고 만다.
3년 3개월 동안 세도가문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되살리기 위해 개혁 정치를 실시한다. 최근 시작한 사극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박보검이 예악(禮樂)을 통해(연회를 통해) 세도가문에게 충성을 맹세 받는 장면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잘 표현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순조의 친제(親製) 제문(祭文)
아! 하늘에서 너를 빼앗아감이 어찌 그렇게도 빠른가? 앞으로 네가 상제(上帝)를 잘 섬길 것이라고 여겨서 그런 것인가, 장차 우리나라를 두드려서 망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착하지 못하고 어질지 못하며 덕스럽지 못하여 신명(神明)에게 죄를 얻어 혹독한 처벌이 먼저 윤사(후사 혹은 세자)에게 미쳐서 그런 것인가? 장차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허물하며 어디에 의지하고 호소할까? ... ...
슬프고 슬프다. 내가 눈으로 네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귀로 네 음성을 듣지 못한지 이미 60일이 지나고 두 절서(節序)가 바뀌었다. 그런데 너는 아직까지 잠이 들어 아침도 없고 저녁도 없이 명명(冥冥)하고 막막(漠漠)하기만 한 것인가? ... ...
너의 청명(淸明)하고 수미(秀美)한 자질과 길선(吉善)하고 상화(祥和)한 기질은 하늘에서 태어나게 한 바가 쉽지 않은데, 그것을 꺾어버리는 데 이르러서는 갑자기 위급한 병(病)에 걸린데다 또 괴잡(乖雜)한 증세가 겹쳐 물이 흘러간 구덩이 같고 불에 타고 남은 재와 같으니, 이치의 믿기 어려움이 어찌 더 갑작스러울 수 없을 정도로 빨랐는가? 어떻게 이른바 비자(제왕의 적장자)의 책임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것인가? 진실인가 거짓인가? 누구를 좇아서 바로잡겠으며, 귀신의 짓인가, 사람의 짓인가? 누가 이를 주장하는가? 슬프고 슬프다. 고고(呱呱)하게 우는 세손이 장차 할아버지를 아비같이 여길터이며, 근심스러운 나의 여생은 장차 나라를 운명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네가 혹시라도 앎이 있다면 나의 이 말을 듣고서 틀림없이 저승과 이승 사이에서 얼굴을 가리고 억울(抑鬱)해 할 것이다. 지금 나의 슬픔은 너로 인한 슬픔일 뿐만이 아니고 나의 어질지 못하고 덕스럽지 못하여 죄를 자신에게 쌓아 나의 훌륭한 자식을 잘 보전하지 못하여 4백 년의 종묘 사직으로 하여금 위태롭기가 하나의 털끝 같지만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슬퍼하는 것이니, 오히려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슬프고 슬프다. 아! 애통하도다.
아버지의 사랑과 불길한 예언
왕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사람은 바로 차기 왕위를 이을 세자라고 한다. 부자(夫子)간에도 나눌 수 없는 것이 권력이라고 한다. 한 하늘 아래 태양이 둘일 수 없다는 말도 있다. 순조는 이런 말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진심으로 맡기고 신뢰 했다. 효명세자 또한 아버지와 왕실의 기대에 부합하며 성장했다. 그러한 효명세자 아니 아들이 죽었으니 그 슬픔이 컷을 것이다.
효명세자가 죽은지 60일째 되는 날 순조는 직접 제문(祭文)을 짓는다. 내용이 짠하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나라의 운명을 비유하기도 한다.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왕이었지만 따뜻한 아버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