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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장역사쟁이 Oct 09. 2016

경주, 원성왕릉에 가다.

괘릉에 가다.




재미없는 교과서 이야기


괘릉은 논란이 있지만 원성왕릉으로 전한다. 원성왕과 관련하여 현행 고등학교 교과서(검인정 체제 / 국정교과서 편찬을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반대 서명한 1人)에 "원성왕은 독서삼품과를 마련하여 유교 경전의 이해 수준을 시험함으로써 관리를 채용하고자 하였다" 만 나온다. 끝이다. 더 이상 내용이 없다. 
 하지만 독서삼품과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 배경을 이야기한다면 내용이 조금 더 있다. "이 제도는 골품제 때문에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유학을 보급하는 데 기여하였다" 는 내용이다.
신라는 골품제 사회였다. 성스러운 뼈 성골, 진짜 뼈 진골 하며 많은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왕족과 세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편입된 부족의 족장에게 주었던 두품(6, 5, 4, 3, 2, 1)으로 나뉜다. 
골품제는 개인의 신분뿐만 아니라 친족의 등급을 나타내는 것으로 개인의 정치, 사회적 활동 범위를 결정했고, 집의 크기, 옷의 색깔, 수레의 크기 등 세세한 것까지도 규제하였다. 개인의 능력은 틀 안에서 인정되었다. 왕족이 아닌 6두품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골품제와 묶여있는 관등제(1등급부터 17등급) 하에서 6관등 아찬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다. 또한 관직의 진출이 4등급까지 제한되었기 때문에 3등급 아래로는 평민화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서 독서 능력에 따라 벼슬을 주는 제도가 제대로 시행될 수는 없었다. 때문에 능력 있는 6두품 출신들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다. 이들을 '도당유학생' 이라고 부른다.
도당유학생을 포함한 6두품 출신들이 신라 말기 견훤이나 왕건(궁예) 밑으로 들어가 책사 노릇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아~~ 재미없다.                                                  







원성왕릉은 신라의 능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추고 있고, 석물의 조각 수법도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화표석이다. 팔각 석주라고 부르는데 능 초입에 있는 것으로 보아 능의 영역을 표시하는 듯하다. 조선왕릉의 홍살문 정도 아닐까 생각된다.                                                  




무인석이다. 생김새가 심상치 않다. 신라 토박이는 분명 아니다. 서역인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아라비아와의 교류를 의미한다.                                                   


문인석


무인석과 같이 옷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복식 연구의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아주아주 많이 재미있게 생긴 사자상이다. 무덤을 지키는 역할을 할 것인데 무덤을 훼손하려 온 자들이 웃겨서 죽을 만큼 재미있게 생겼다. 네 마리 모두 정면을 향해 서 있지만 고개는 동서남북을 바라보고 있다.                                                   



최고의 걸작으로 완성도 높은 조각으로 평가받는 12지상이다.(김유신 묘에 한 표) 하지만 몇 개를 제외하고는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세월의 흔적이 깊다. 말과 뱀이 가장 분명하게 남아있어 순서대로 따라가면서 아~~하며 확인은 가능하다. 
보존 상태가 양호한 것을 통해 돋을새김 수법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본 김유신 묘 12지의 두 배는 족히 되는 듯하다. 12지는 갑옷을 입고 중무장을 하고 있다. 앞에서  본 사자석상이 웃고 놀만하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믿는 구석이 있었던 거야.....     


조선의 왕릉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격식과 완성도가 높아 보인다. 양쪽에 화표석 하나, 무인석, 문인석 둘, 사자석상 둘이 놓여 있다. 12지상을 새긴 호석이 봉분 둘레를 감싸고 있고, 그 주위에 돌난간을 다시 쌓았다.
원성왕릉은 '괘릉(掛陵)' 이라고도 부르는데 이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무덤의 구덩이를 팔 때 물이 많이 나와서 구덩이에 널을 걸고 관을 널에 걸었다는 이야기와 능이 위치한 자리가 본래 연못이었는데 왕의 시신을 연못의 수면 위에 걸어 안장했다는 이야기다.






재미있는 처용이야기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處容)이야기. 
<처용은 용의 아들이다. 그의 아내가 매우 아름다워  역신(疫神)이 흠모하여 사람으로 변해 밤이 되면 그 집에 와 몰래 자곤 하였다.
  처용이 밖에서 집에 돌아와 두 사람이 자고 있는 것을 보고 노래를 지어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는데 그 노래는 이렇다.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새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

  그때 역신이 형체를 드러내 처용 앞에 끓어 앉아 "제가 공의 처를 탐내어 범했는데 공은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탄스럽고 아름답게 생각한다. 맹세코 오늘 이후로 공의 형상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문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 후로 사람들이 문에 처용의 형상을 붙여 사악함을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으려고 하였다.>
  처용 설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 처용은 "누구일까?" 궁금해하며 나름의 주장을 펼친다.
   첫째, 헌강왕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있다. 왕이 순행 중에 신분이 미천한 여자와 관계해 몰래 낳은 자식이라는 주장이다.
  둘째, 아라비아 상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처용의 생김새에 대해 용모가 산과 바다의 정령을 닮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인과 다르게 생겼다는 얘기다. 또한 원성왕릉의 무인석에 보이듯이 아라비아 상인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숫자와 상업에 밝은 아라비아인 처용을 받아들이기 위해 관직을 주고 결혼까지 시켰주었다는 이야기다. (한 발 더 들어가면 처용 설화의 내용을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처용과 결혼하게 된 여인이 바람을 피웠을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셋째, 지방 호족의 아들이라는 주장도 있다. 헌강왕(875
~886)은 신라 하대의 왕이다. 당시는 신라 중앙정부의 힘이 약해지고 지방호족이 성장하던 시기다. 유력한 호족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호족의 아들에게 관직을 주었다는 주장이다.
  처용의 설화는 현재 진행형이다. 아직까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이는 풍습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처용이 부르고 추었다는 '처용가' 와 '처용무' 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정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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