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3년을 돌아보며
퇴사 후 3년 간의 삶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라면 위와 같이 쓰겠다.
'일자리, 커리어, 취업/이직 시장, 공채의 종말, 신입 퇴사율, 퇴사, 사이드잡, ...' 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키워드가 있다. 피로한 주제임이 분명하지만 누구도 쉽게 피해갈 수는 없는 화두다. 나 역시 그랬다.
몇 년 전, 나도 퇴사의 표준 모델과도 같은 '대기업을 다녔지만, 내 일을 하기 위해서' 멋지게 회사를 걷어 차는 꿈을 꿨다.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대기업 취업'이라는 선결 조건이 필요했지만, 나는 대기업은 고사하고, 정규직에 이르지 못했다.
외로웠다. 퇴사를 하고서 주위에 만날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회적으로 외로웠다. 갈짓자로 이어지는 짧디 짧은 커리어 덕분에 여기 저기 만날 사람은 많았으나 꾸준히 함께하는 동료는 만들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외로워 하다가 책을 폈다. 그러자 자기 이야기를 써 내려간 수많은 외로운 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외로웠던 사람들이 남겨놓은 이야기는 외롭지 않았다. 책을 읽으며 외로움은 크게 덜어낼 수 있었고, 이제는 절박함의 문제를 풀어야 했다.
책을 통해 만난 저자들은 하나같이 절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삶과 커리어가 절박했을 때 그들은 썼다. 낙향한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500여 권의 저술을 남긴다. 그것도 혼자 잘 살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이 전혀 나아지지 않는 백성들을 위해서 썼다. 자신의 삶이 궁지에 몰렸을 때 다른 사람을 위한 마음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다산을 통해 배우기도 했다.
집정관의 임기가 끝나가자 카이사르의 정치적 커리어는 큰 위기를 맞는다. 그렇게 로마의 변방인 갈리아로 간 카이사르는 8년 간, 갈리아를 정벌하기 시작했다. 누가 시킨 일이 아니었지만, 카이사르는 로마의 원로들에게 편지를 쓴다. 그 편지는 <갈리아 전쟁기>라는 전쟁 문학의 정수로 평가받는 책으로 남았다. 정치적 커리어가 끝난 것이나 다름 없었지만, 갈리아에서 그는 썼다. 카이사르가 로마로 돌아왔을 때, 어떤 자리가 주어졌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또, 그 유명한 조앤 롤링도 있다. 나라에서 지원을 받으며, 삶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던 조앤 롤링은 카페를 전전하며 <해리포터> 시리즈를 썼다. 사실 조앤 롤링이 제일 미스테리다. 자신의 삶이 진창이라고 여길 때, 자신의 콘텐츠에 그렇게 재밌게 몰두할 수 있을까?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하루 분량의 이야기를 짓고 즐거워했을 조앤 롤링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내가 이들처럼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내 절박함이 그들의 절박함보다 가볍진 않았다. 퇴사 후 지난 3년 간, 나는 뭔가를 해낼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가? 잘 모르겠다. 다만, 이들만큼, 혹은 이들보다 더욱 절박했다. 그리고 그 절박함을 동력으로 삼았다. 절박하면 좋은 점이 있다. 절박하면 '내가', '지금', '무엇을', '할 것'인지 조금 더 선명하게 생각할 수 있다. 삶에서 필요 없는 영역을 덜어내야만 생존이 가능하기 때문이리라. 내가 절박함에 맞서 선택한 것은 정약용, 카이사르, 조앤 롤링과 마찬가지로 '내 이름으로 된 무언가를 남기기'였다. 콘텐츠였다.
회사 안에 있을 때는 인사 평가에 온 신경이 곤두선다. 회사 밖으로 나오면 내 성적표, 내 고과를 어떻게 측정해야 하는지 알기가 어렵다. 길을 잃기가 십상이다. 나는 '콘텐츠 만들기'를 내 업무로 정했다. 내 이름으로 남는 내 콘텐츠가 있다면, 사회적 자아를 확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또, 어쩌면 이것이 전문성으로 승화되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였다.
그렇게 17년 1월 말, 퇴사를 하고 꼭 3년이 채워져 가는 시점에 이르렀다. 지난 달 출간한 <회사 말고 내 콘텐츠>과 세 편의 전자책을 포함해서 총 4개의 결과물을 만들었다.
콘텐츠 그 자체에 대해서는 지금도 독자분들이 평을 해주고 있다. 그것 말고, 결과물에 이르기 위해서 노력한 나 자신을 평가해보면 이렇다. 절박함 앞에 잘 싸웠고, 애썼다. 그리고 한 가지 좋은 평을 주고 싶다.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첫 번째 콘텐츠를 상기해보면, 3년간 성장이 많았다는 점에 A+을 준다.
(첫번째 콘텐츠는 정말 부끄러워서 내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독자 가운데 일부가 초라한 내 출발점을 보고 나서 용기를 얻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대로 두고 있다.)
쓴다고 해서 꼭 무슨 좋은 기회가 찾아오는 건 아닐 터다. 그렇지만 무슨 일이라도 날 것처럼 써나간다면,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 그 패기를 지니고서 자기 작업을 혼자서 이어가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고나면 나중에 결과물을 갖고 누군가에게 제안을 할 수 있는 정도는 된다.
쓰는 게 왜 이렇게 중요해졌을까?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수많은 콘텐츠가 쏟아지는 지금, 모두가 바쁜 지금, 이 세상에 누구도 조용하게 웅크리고 있는 당신을 발견해 줄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 준비하고 있다면 준비하고 있다고 쓰고, 이런 저런 구상이 있다면, 그 기획에 대해서 쓰면 된다. '쓰기'는 곧 새로운 자기소개서고, 변화하는 세상에 내미는 새로운 명함이 되어가고 있다.
한 발 더 나아가서, 맥락 없이 쓰지 말고, '이런 식으로 10편을 쓰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까'를 염두에 쓰면 도움이 된다. 네이버 블로그에는 세상 만사에 대한 카테고리를 만들고 그에 대해 쓰는 분들이 많은데, 그 방식으로는 콘텐츠를 만들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브런치에서 '매거진', '브런치북' 같은 포맷을 제공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회사 말고 내 콘텐츠>에도 썼지만, 콘텐츠가 되려면 하나의 '완결성'을 향해서 수렴해야 한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온다'는 말에 동의한다. 한 마디 보태자면, '기회를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기회는 더 잘 찾아온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기회는 '쓰기'에서 온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어디서 어떻게 보고 연락을 주는 것인지, 책을 읽었다며 간만에 닿은 지인들의 연락 모두가 반가웠다. 책을 평생 읽지 않던 친구가 내 책을 첫 책으로 읽었다는 연락 역시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출간 후 한 달이 지났을까. 내게 소름 돋는 연락이 왔다. 페이스북 메세지로 다음과 같은 사진과 함께, 책을 잘 읽었노라는 연락이었다.
<회사 말고 내 콘텐츠>가 실용서이고, 공신력 있는 평가를 해 줄 '평단'같은 것도 없는 것이니. 독자들 한 분 한 분의 목소리가 귀하다. 그러다 30년차 출판인께 이런 과분한 메세지를 받으니 뛸 듯이 기쁜 일이다. 부던히 더 좋은 책을 내려고 애써야겠다.
또한 값진 후기도 많았다. GX 2기로 참여하신 김정욱님, 러닝 퍼실리테이터 정강욱님, 마이크로소프트 이소영 이사님, 멘탈경험디자이너 조명국님, 한국마이크로소프트 우미영 부사장님, 장한별 변호사님께서 후기를 남겨주셨다. 제일 펑타이 한국 지사장이신 최원준님의 4년치 독서 목록에도 들어가게 됐다.
(페이스북에 전체 공개로 남겨주신 분들 기준입니다. 이 외에도 제보를 받습니다!)
몇 가지 반갑고 감사한 제안도 있었다.
앞으로의 '커리어'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바탕으로 준비하고 있는 스타트업 allius에서 '읽고 해 보는 독서모임'을 한다.(1/17, 강남) 독서를 기반으로 하는 멤버십 커뮤니티 브링크의 한 모임에서 <회사 말고 내 콘텐츠>를 2월의 책으로 선정해주셨고, 더불어 북토크를 진행하게 됐다.(2/9, 대구) 패스트파이브 신논현점에서 북토크를 진행할 예정이다.(2/18) 더 재미난 제안도 있는데, 천천히 준비되는대로 알리려 한다.
또 다른 제안도 있었다. 책을 내고 얼마 후에 클래스101로부터 제안을 받고, <전자책으로 시작하는 회사 밖 내 콘텐츠 만들기> 클래스를 열게 됐다. 종이책을 출간하고, 좋은 평가를 받게 되기까지 전자책을 세 번 낸 경험이 매우 도움이 됐다. 이렇다 할 커리어 경험이 없는데도, 이 시대는 콘텐츠를 가진 사람을 반긴다. 자신의 커리어에 안전장치, 혹은 퍼스널 브랜딩이 필요한 분들에게 감히 제 클래스를 추천드린다.
2020년에는 콘텐츠 코치라고 내가 이름 붙인 나만의 역할을 세상에 더 적극적으로 제안하려고 한다. 기존에 운영하던 GX (오리지널 콘텐츠 공방) 프로그램은 1월 중순 모집을 시작할 것이고, 이 외에 제안받고 새로운 기획에 대해선 브런치와 생각서랍 뉴스레터를 통해서 더 성실히 알릴 계획이다. 구독을 부탁드린다.
2020년을 맞이하며 계획을 세워 보다가 잠깐 멈춰선 상태다. 여러 제안 속에서 내 역할을 다시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편으로는 먼저 '일'에 대한 내 관점을 더 단단히 만들고 뛰어가고 싶단 생각이다. 혼자 일을 하다 보면 '해야 하니까 해야 되는' 일들이 많아지고, 그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겪게 된다. 그런 점에서 무엇을 내 일로 볼 것이며, 내 일을 내가 어떻게 기획할 것인지 좀 더 천천히 고민하며 가고 싶다.
2020년. 내 속도를 넘어서지 않게 일을 하고, 진부함을 느끼지 않을 만큼 일을 하며, 내가 느끼는 즐거움보다 더 큰 경험을 전하기 위해 일을 해 보려고 한다. 그래서, 내년 이 맘 때를 돌아볼 때, 나와 함께 하는 분들과 나 자신이 훨씬 풍성해졌음을 기분 좋게 확인하게 되기를 바라며.
- 책 《콘텐츠 가드닝》 , 《회사 말고 내 콘텐츠》 저자
- 콘텐츠 기획자, 콘텐츠 코치
커리어의 궤도를 이탈하고 콘텐츠를 자전축으로 삼고 있는 창작자. 창작 경험이 개인의 변화와 성장을 가져다 준다는 믿음 아래 콘텐츠 코치로 일하고 있다. 더 많은 이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창작을 경험하고 콘텐츠를 기를 수 있도록 교육과 코칭을 통해 돕고 있다.
- 프로그램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