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깜빡쟁이야!
이유가 있다. 이 놈아~~!!
아들이 예닐곱 살 즘 노래를 창작해서 부르기 시작했다.
엄마는 깜빡쟁이야.
밥 먹을 때도 깜빡!
유치원 갈 때도 깜빡!
마트 갔다 와도 깜빡!
절대음감이 아니라 오선지에 그리지도 못하지만
음성지원이 안 되는 지면에 글만 적어두니
왠지 오빠는 풍각쟁이야~가 생각난다.
오빠는 풍각쟁이야처럼 간드러진 노래도 아니고
뭔가 자연스러운 음전개도 아닌 막 부른 노래다.
서동요의 목적이 선화공주와의 결혼이었다면
깜빡쟁이송의 목적은 엄마 놀리기와
그만 좀 깜빡하라는 엄마를 향한 압박이었을 거다.
그땐 몰랐다. 왜 그리 정신이 없고 깜박깜박하는지...
하루가 저물고 나서 돌이켜보면 별로 한일도 없는데
하루 온종일 무엇 때문에 그리 종종거리면서도
깜빡하고 놓치는 것들이 생기는지...
매일밤 의문을 품다가 어느 날 적어보았다.
종일 내가 무얼 하는지.
그리고 깨달았다. 밤에 생각나는 게 별로 없는 이유를.
대단한 일은커녕
얼개도 맥락도 없는 잡다구리한 일들이 온종일이다.
매일 하는 설거지 빨래 청소 3종세트는 양반이다.
이미 쓴 물티슈가 깨끗하면
창문틀이나 베란다 창틀 먼지를 한번
닦아줘야 지구한테 덜 미안하고
눈이나 비가 온날, 혹은 흙먼지를 신에 묻혀 온 날은
현관 신발장도 쓸고 닦아줘야 한다.
전자레인지 안도 종종 닦지 않으면
온갖 음식이 튄 잔해들이 화석이 되어있을 거고
세탁기도 아래 먼지 거름망을 비워주고
세제투입구도 닦아주지 않으면 꼴이 말이 아니다.
또 채워놔야 할 것들도 많다.
주방세제와 세탁세제는 동시에 동나지 않고
티슈와 키친타월이 타이밍 맞춰 떨어지지 않는다.
샴푸 치약 바디워시 바디로션 등
재고 체크를 해둬야 할 품목도 꽤나 많다.
휴지는 화장실에도 재고관리를 해줘야
가족들이 당황할 일이 생기지 않는다.
그나마 생활용품은 그래도 주기가 긴 편이다.
우유가 떨어지고 식빵이 떨어지고
사과가 떨어지고 쌈장이 떨어지고
순서도 소진기간도 예측할 수 없어서
매일매일 해먹일 식사와 간식재료를 채우는 데에
나의 우아하고 멀쩡한 정신을 써야 한다.
물론 로켓으로 프레쉬! 하고도 와우! 하도록
번개처럼 새벽별 아래로 배송해 주는 덕에
마트 가서 지고이고 오는 수고는 덜었지만
더 편하고 더 빠른 서비스들이 생겼는데
그 시간만큼 그 수고만큼 나에게
여유가 생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러니하게도 더 편해지고 있는데 더 정신없어지고 있다.
아이들이 학교를 가면 학원을 다니면
엄마의 정신없음은 배가 된다.
3월 초에는 학교에서 알리미 어플을 통해
하루 수십 개씩도 공지가 날아온다.
학교 일정으로 학원을 못 가게 되거나 늦는 것도
그 연락은 다 엄마 몫이다.
학교의 권장도서를 근처 도서관에
아이와 빌리러 가지만 한발 늦은 덕에
대기와 타도서관에서 상호대차를 신청하고
도착했다는 알림이 오면 기한 내에
다녀오는 것도 내 몫이다.
잘못하면 미안하고 죄송한 일 투성이가 되고
잘해도 티도 안나는 집안일과 아이들 챙기기에
입이 나와있던 어느 날 시어머니 전화를 받았다.
퇴근했냐고 다정히 물으시기에
퇴근길인데 아이들 새 학기 준비물이 한가득이라
문구점 들렀다가 가는 길이라고 말씀드리니
"아이고, 정신없지? 정신없어도 그때가 좋았던 거더라.
챙길 아이들이 있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던 때가."
갑자기 울컥했다.
일흔이 넘어가는 노부부 둘이 사는 아파트.
우리가 가면 우리가 그 빈 공간을 채워 몰랐지만
시부모님도 친정부모님도 방이 남아돌게 된 집에
두 분만 계실 거라 생각하니
화낼 일도 웃을 일도 없이 평온하지만
적막할 만큼 조용한 일상이
나는 겪은 적도 없이 상상만으로 시큰거린다.
갑자기 깜빡쟁이의 매일이 감사로 차오른다.
다들 건강하니 학교도 가고 회사도 간다.
순둥한 사춘기들이니 학원도 가고
집에 와서 조잘조잘 귀가 따갑게 수다도 떤다고 생각하니
정신없는 일상도 감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