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이 가까워지면 전국의 어린이집과 유치원, 그리고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바빠지신다. 당신들의 어버이보다 당신들 제자들의 어버이를 위해 재료를 고르고 만들기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 유초등 아이들과 색종이를 접든, 펠트를 오려붙이든, 점토를 조물딱거리든 선생님의 지휘하에 카네이션이 탄생한다. 붉은색 계열이라면 어떤 재료로든 카네이션 몇송이즘은 뚝딱 만들어 내실 듯한 선생님들이 애쓰시는 그 수업덕에 전국의 유초등생 부모님은 마음 편하게 어버이날을 맞는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만들어온 어버이날의 추억
그러나 중학교에 가면 어버이날이 더 이상 학교의 관리 영역이 아니다. (우리 동네 어느 중학교는 어떤 센스쟁이 선생님이 기획하셨는지 어버이날 하교 때 모든 아이들에게 카네이션 한 송이씩을 쥐어 보내 그 동네 전체가 행복했다는 소문도 돈다.) 학교에서 만들기와 편지 쓰기 시간만 없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무려 사춘기이다. 쑥스러움과 창피함을 구분 못하는 서투름과, 무심한 것이 쿨하고 멋있는 거라 생각하는 허세가 뒤섞인사춘기. 특히 남아들은 더 그렇다.
지역맘카페에 들어가니 여기저기 상반된 표정의 글들이 올라온다. 기대이상의 감동과 사랑스러움을 안겨준 아이들도 있지만, 엄마의 최소한의 기대를 저버린 아이들도 많다.
- 우리아들만 카네이션 안 사 온 거 아니죠?
- 오늘 꽃 못 받으신 분?
- 우리 아들도 그래요. 제가 잘 못 키웠나 봐요.
- 저희 아들도 귀찮데요. 더럽고 치사하지만... 저도 이제 이 자식 생일 안 챙긴다고 선언했어요.
- 정말 서운해요. 교육 다시 시켜야겠어요.
- 대학생 아들이 문자 왔어요. "늦을 거 같으니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자요." 신경은 니가 써야지! 나쁜 놈아~
- 저희 집 고딩이는 시험 끝나고 용돈 탕진해서 돈이 없다고 어쩔 수 없다네요. 기가 막혀요.
- 장 보다가 꽃사가는 남의 아들들 보고 흐뭇하고 기특해서 울컥했는데 정말 빈손으로 들어온 아들 보니 너무 서운해서 눈물까지 나요. 어릴 적부터 정말 손 많이 가고 힘들었는데... 이게 내 팔자인가 싶고.
- 저희 집은 딸인데도 말도 없고 꽃도 없네요.
- 이걸 가르쳐야 하나? 당연한 거 아닌가 싶으니 화는 나는데 말하기도 치사하고 누가 알까도 창피해요.
- 전 협박해서 받아냈어요. 반강제라도 기분이 나아지네요.
- 어린이날, 어버이날 돈은 돈대로 쓰고 큰 아이한테 상처받고. 5월은 푸르구나. 제 얼굴이...
성토대회가 열렸다. 이런 글들을 읽으며 설마! 하고 있었는데 걱정이 기도가 되어버렸을까. 불안한 예감을 누르며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들에게 해맑고 장난스레 웃으며"오늘 무슨 날이게?" 하고 운을 뗐다. 딸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학교에서 만들고 쓴 카네이션을 붙인 편지를 들고 오는데, 아들은 얼굴이하얗게 굳어가고 있다.
"엄마 진짜 미안. 나 오늘이 어버이날인지 깜박했어. 아 어버이날도 왜 쉬는 날이 아닌 거지? 평일이니깐 깜박하기 쉽잖아." 머쓱하고 열없는 마음에 애꿎은 공휴일타령을 한다. 나보다 더 당황한 아들을 보니 화보다 웃음이 나왔지만 웃음은 꾹 눌러 숨겼다. 가르쳐야 하는 순간이고 엎드려서라도 절을 받아내는 나의 기술을 써야 하는 타이밍이다. "아직 아빠도 안 오셨고 어버이날이 몇 시간 남았있어. 같이 나갈까?"
남의 글을 볼 때는' 어린이집부터 초등학교까지 약 10년을 매해 세뇌시켜도 자동화가 안 되는 아이들이 있구나' 했는데 제법 다정한 내 아들도 거기에 끼어있다. 그렇지만 부모는 아이를 '당장' 변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결국' 변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들과 나가서 같이 꽃을 사고 집 앞 슈퍼에 가서 엄마아빠 안주거리를 사달라고 했다. 집에 와서 아들 손바닥의 반만 한 편지지를 주며 편지도 쓰게 했다. 이미 익숙한 엎드려 절 받기다.
엎드려 절 받기의 내공이 16년 넘게 쌓다. 결혼 전에 30년 넘게엄마의 생일날이나 결혼기념일, 심지어 엄마아빠 두분이 처음 만난 날까지 곰살맞게 챙기는 아빠를 보며 자란 나에게 생일과 기념일의 꽃과 선물은 옵션이 아닌 초기설정값이었다. 같이 식사를 하고 선물을 하고 케이크 위의 초를 불고 태어나줘서 고맙고 낳아주셔서 감사하단 말을 주고받는 소중한 날이었다. 그러나 시골에서 자란 남편은 생일과 기념일을 챙긴다는 기본 개념조차 없었다. 기억하고 있으면 챙긴 거라는 황당한 날도 있었다. 아무리 틀린 게 아니라 다른거라지만 한 살차이나는 동시대를 280km떨어진 곳에서 살아왔다고 이렇게 다른 건가. 신혼 때는 그게 참 서럽고 서운했다. 그러나 경험이 없는 거지 나와 아이들에 대한 애정은 차고 넘치는 사람이니 엎드려 절을 받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말과 행동이 없는 거지 마음이 없는 건 아니라고 믿었다.(지금도 믿고 있다.) 형식을 갖추고 표현을 하는 것에 서투를 뿐이다. 물론 내 마음 깊이에서는 진짜 이걸 모르나 싶지만 어찌하랴. 그걸 모르는 사람을 내가 고른 걸. 그러니 가르쳐주자. 엎드려서라도 절을 받자. 그럼 언제가는 엎드리지 않아도 절을 하겠지.
그래서 포스트잇에 '신랑이 꽃을 사 오는 날: 언제, 언제, 언제" 적어서 지갑에 넣어 주기도 하고 생일이나 기념일이면 식당을 예약하는 때라고 AI 알림처럼 영혼없이 알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진짜 AI가 아닌지라 때론 몇 년째인데 계속 시켜야 하는 거냐고 앙앙불락하기도 하지만. 시부모님이 우리 집에 계시다가 가신 날에는 "자, 얼른 수고 많았다고 말해줘. 애썼다고 저녁 뭐 사줄까 물어봐줘." 등의 엎드리다 못해 땅을 파고 머리를 숙이는 날도 있었다. 절을 받으려면 절을 해서 보여줘야 한다. 자존심이 상하고 배알이 뒤틀려서 못하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평생 같이 살아야 하는 남자에게 서운함을 쌓기보단 내 취향에 맞게 가르치는 게 남은 인생 내 마음이 편할 거라 믿었다.
그러니 어버이날에 카네이션 정도 깜박한 아들이야 금방 가르칠 수 있을 거다. 이미 색칠된 도화지도 다른 색으로 칠해가고 있는데 백지에 색칠은 일도 아니지! 그런데 나란 사람 참 쉬운 여자, 아니 쉬운 엄마다. 늦게나마 헐레벌떡 아들이 사 온 꽃을 보니 행복해진다. 이게 뭐라고.
사무실 조카들의 어버이날 (초2,유치원생, 어린이집 다니는 2세). 요즘 이 녀석들 이야기듣는 재미에 회사다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