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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제라도봄 Apr 03. 2024

온수가 안 나오는 집의 추억

3불은 버리고 3감은 취하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치즈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이라는 소설이 있다. 30년 전 고등학교 1학년때 우연히 읽게 된 이 책에서는 가난한 신혼부부가 기차가 교차하는 그 뾰족한 땅에서 사는 모습을 그려낸다. 돈이 없어 얻게 된 월세집은 뾰족한 치즈케이크 모양으로 케이크의 제일 긴 두면으로 열차가 지나다닌다. 낮에는 여객 열차가, 밤에는 화물 열차가. 당시엔 이 책이 소설인지 모르고 하루키의 수필이라 생각해 하루키의 가난에 어마하게 몰입하며 읽었다. 소설속 가난을 읽으며 나의 가난은 어떤 모양일까를 생각했다. 경험도 정보도 모자랐고 철도 없었던 당시의 나는 우리 집이 가난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생각했고, 내가 나중에 하루키 같은 작가가 되면 나의 가난은 온수가 안 나오는 것이라 써야겠다 싶었다. (지나고 보니 당시상황에 가난이란 단어를 쓰기는 매우 민망하다.)


부모님은 수도권 외곽에서 직장 때문에 서울로, 또 서울에서도 조금 더 중심가로 이동하면서 전셋집의 여건은 점점 안 좋아졌다. 집이 있는 위치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초등생은 우리 집이 점점 좁아지고 점점 낡아지고 점점 열악해지는 것이 뭔가 상황이 안 좋아지는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88 올림픽이 열리던 초등학교 4학년 시절 이사 간 그 집은 그전엔 내가 경험한 적이 없던 집이었다.


그전에 살던 외곽지역 아파트들은 당시로서 비교적 새 아파트들이라 중앙난방이 되고 욕조도 있는 신식집이었다. (물론 구식집을 가기 전까지 그게 신식인 줄도 몰랐다.) 그런데 이사 간 5층짜리 13평 주공아파트는 일단 거실이 존재하지 않았다. 좁은 신발장에 신발을 벗고 발을 올리면 지금 우리 집 식탁만 한 좁은 공간에 문만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신발장에서 올라서면 오른쪽에 작은방 문이 있고 바로 그 옆에는 화장실 문, 그리고 신발장과 마주 보는 곳은 주방으로 내려가는 문이 있고 왼쪽 편으로는 안방문이 있었다. 한마디로 모든 공간을 나누기 위한 공간이랄까. 모든 문을 닫으면 빛도 들지 않는 그 공간에는 이름도 없었다.


지금은 뷰때문에 탑층이 펜트하우스가 되기도 하지만 단열이란 개념도 없고 냉난방이 어려웠던 시절 탑층은 정말 냄비도 그런 냄비가 없었다. 여름엔 옥상이 낮동안 받은 열을 고스란히 우리 집으로 전해주었고, 맞바람으로 환기시키기 어려운 집이어서인지 그 열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온실효과로 집안은 열기가 계속 내려와서 집 밖이 더 시원했다. 대문옆에는 옥상으로 올라가는 검은색 철제 사다리가 있었다. 호스를 들고 올라가 물을 뿌리면 저녁에는 조금 살만해지겠지 하는 기대로 엄마랑 남동생은 여름이면 자주 그 불안한 사다리를 올랐고, 열대야가 심한 여름 며칠은 아빠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다녀와 집이 식으면 잠자리에 들기도 했다.


겨울이 되면 이불 밖을 나가기 싫을 정도로 코끝이 시렸다. 그러나 더위와 추위는 그런대로 적응할 수 있었는데, 그 무엇보다 제일 고역이었던 것은 온수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 아파트 모든 집이 온수가 안 나오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가인 경우 '응답하라 1988'의 정봉이네처럼 대부분 보일러를 교체해서 온수도 쓰고 난방도 효율적이었을 거다. 그러나 덕선이네처럼 연탄을 때던 우리 집은 겨울이면 계단참에 연탄을 쌓아놓고 연탄불이 꺼지지 않게 관리를 해야 했다. 또 그 연탄아궁이 위에 커다란 냄비솥을 올려 물을 데우고 그 물을 찬물과 섞어 머리를 감거나 씻어야 했다. 화장실도 좁아서 커다란 솥과 세숫대야하나를 놓고 쪼그려 앉으면 엉덩이가 벽에 닿았다. 중3까지 6년을 한 여름을 제외하고는 매일 씻는 것이 일이었다. 그래서 고1에 치즈케이크 모양의 집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그 집에는 온수는 나왔을까 궁금했다.


생각해 보면 그저 씻기 힘든 불편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다. 엄마는 그 차가운 타일 위의 주방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엄마가 되고서야 짐작해본다. 겨울이면 분명 중무장을 하고 들어가 얼음같이 찬물에 쌀을 씻고 밥이나 국을 가스레인지에 올려야 겨우 가스불의 온기를 손에만 쬘 수 있으셨겠지. 그렇게 힘들게 해 주시는 밥인지도 모르고 시험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면 남기기도 하고 반찬투정도 했던 게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 이기적이고 눈치도 없던 딸은 그런 노고를 헤아리지 못했다. 난방도 되고 온수도 나오고 전기밥솥과 전기포트, 인덕션까지 갖춰진 지금 내 주방에서 아이들 밥 하는 게 귀찮아지는 날이면 35년 전 나보다도 어렸던 엄마를 떠올리며 힘을 낸다.




그런데 철없이 어려서였을까? 사실 그 집에서 우리 가족은 행복한 추억도 정말 많았다. 공부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던 무심한 나와는 달리 5살이나 어린 남동생은 동화에 나오는 해맑은 아이였다. 엄마가 그 주방에서 쪼그려 앉아 김장을 하는 날이면 하굣길에 꼬깃한 용돈을 털어 산 박카스를 한병을 김장중인 엄마에게 건네고 엄마가 김장을 하는 동안 요를 뒤집어 놓았다. 나는 엄마가 김장을 끝내고 나서 방에 들어와 "어머 왜 요를 뒤집어 깔아놨니?"라고 물으시기 전까지 보지도 못했다. 동생은 그제야 그 요를 다시 뒤집으면서 엄마 몸을 녹이시라고 했다. 엄마는 울컥할 정도로 감동하셨고, 나는 부끄러웠다. 개구쟁이였지만 한없이 따뜻했던 동생의 마음에 엄마의 언 손발이 녹고, 얼어있던 내 마음도 녹았다.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니지만 이 에피소드는 분명 한동안 아니 두고두고 엄마의 자랑거리였을 거다.


거실이 없으니 큰 방이 거실이고 공부방이고 침실이어서 우리는 주로 안방에서 생활하고 놀고 또 넷이 모두 모여 잤다. 그런데 네 명이 일렬로 누울 수가 없어서 한 명은 세명의 머리 위에 T자로 누워야 했다. (그 한 명은 주로 아빠였다.) 비록 나란히 눕지는 못했지만 넷이서 누워 그렇게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키득거렸던 그 밤들은 지금도 따뜻한 추억이다. 출근과 등교의 부담이 없던 토요일 밤에는 수다를 떠는 중에 엄마와 동생이 먼저 잠들었는데도 아빠랑 계속 실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던 일도 생생하다. 그때 나누었던 사소하고 시시콜콜하지만 소중한 이야기들을 기록해 두지 않은 것이 한없이 아쉬울 뿐이다. 좁아서 살을 비비며 지내야 했고 겨울에는 서로의 체온이 가족애가 되고 의리가 되었다.


출처: 네이버블로그 초청장군님

또 작은 방은 대체로 냉골이었지만 한 구석은 주방 연탄아궁이 뒤편이라 희멀건 장판이 갈색이 될 만큼 뜨끈한 아랫목이 있었다. 겨울이면 그 아랫목에 엄마랑 동생이랑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밍크담요를 덮고 손이 노래질 때까지 귤을 까먹던 추억도 빼놓을 수 없다. 그 핫스폿은 10분쯤 앉아있음 다시 차가운 윗목을 찾아 엉덩이를 식혀야 할 정도로 뜨거웠다. 아빠가 늦게 오시거나 밥이 남는 날에는 뚜껑이 있는 스텐 밥그릇을 수건에 싸서 두면 전기 없이 보온이 시작되었다. 엄마가 허리가 아픈 날은 전기찜질팩의 역할도 했다. 또 엄마는 그 아랫목에서 당시로선 드문 홈메이드 요거트도 만들어 주셨다. 우유에 요구르트를 섞어 뚜껑을 덮고 담요에 싸서 그 아랫목에 두고 하룻밤 자고 나면 몽글한 요거트가 되어 있었다. 뜨뜻미지근한 갓 만든 요거트도 별미였고, 감질나게 양적은 요플레 대신 엄마가 만든 요거트를 크게 한 국자 떠서 엄마가 만든 딸기잼 한 스푼 듬뿍 넣어 먹으면 딸기요플레가 울고 가는 맛이었다. 다만 연탄을 때는 때만 먹을 수 있는 시즌 한정판이었던 것이 아쉬웠다.


그 집에서 울고 웃고 6년을 보내고 우리는 다시 동네는 한참 못하지만 새로 분양받은 새 아파트에 입주하게 되었다. 정말 꿈같았다. 이사하고 일주일은 집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발바닥이 아프다 느낄 정도로 넓었고 내 방도 동생 방도 따로 있었다. 물론 온수도 24시간 365일 마음껏 쓸 수 있었다.


집의 크기나 내 방, 주방의 편의 등 모든 것이 금세 익숙해지고 당연해졌는데 온수만큼은 지금도 누리고 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난 샤워를 할 때 내 맘대로 온도를 조절해서 쓸 수 있는 그 따뜻한 물이 참 고맙다. 얼마 전에 알게 되었지만 남동생은 새 집에 이사 간 후에도 한겨울이 아니면 찬물 샤워를 꽤 오래 했었다고 한다. 언제 다시 그런 집으로 가서 살게 될지도 몰라서 그랬단다. 겨우 초등고학년짜리가 그런 마음으로 온수를 지 않았다니 짠한 마음이 올라온다. 그러나 그 덕에 우리 남매는 남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샤워기의 온수가 행복이고 감사가 된 것은 거꾸로 득이 아닌가 싶다.


어제 서점에서 새로 나온 신간을 들춰보다가 이하영원장의 책에서 3불(불평 불만 불안)을 버리고 3감(감사 감동 감탄) 하고 나서 성공하고 부자가 되었다는 글을 보고 생각했다. 당시 여러 불편함에도 불평하거나 불만을 가지기 보다 늘 긍정적으로 밝게 사셨던 부모님의 덕이 아닐까 싶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 나도 마음가짐을 다시 가다듬어 본다. 감탄하고 감동하고 감사하며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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