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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verux Aug 15. 2018

철학을 한다는 것의 의미

탁월한 사유의 시선

한 때, 인문학 열풍이 불었다. 인문학은 기술의 진보와 관계없이 인간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특징을 발견해내고, 이를 다양한 텍스트로 표현한다. 인문학은 문사철로도 불린다. 문은 문학, 사는 역사, 철은 철학이다. 


문학을 통해 우리는 다양한 인간군상을 발견하고 감정의 풍부함을 깨닫게 된다. 환희, 기쁨, 분노, 좌절, 연민, 회한, 동경, 멸시, 공포 등이 그 예다. 우리는 문학 속 등장인물을 통해 나의 감정을 투영하고 그 감정에 이름표를 붙일 수 있게 된다. 내 감정을 온전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면 그 감정을 제어하고 효과적으로 다루는 방법도 체험하게 된다. "야, 이 XX야...너 일을 그 따위 밖에 못해"라는 상사의 폭언을 들었을 때, 아무런 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우리는 극도의 좌절감으로 무기력해진다. 이럴 때 문학을 통해 그 감정을 미리 들여다봤다면 조금은 대처가 가능하다.


문학이 인간의 감정과 이야기에 주목했다면, 역사는 특정 시대에 일어났던 사건, 인물, 풍습을 통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문명의 특징을 포착해낸다. 물론, 대부분의 역사는 왕, 지도자, 권력층의 기록을 대변한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시대와 관계없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특징을 알 수 있고, 지금의 시대와 비슷했던 시대를 살펴봄으로써 앞으로 펼쳐질 양상을 예측해볼 수도 있다. 


철학은 그 접근법이 문학과 역사랑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철학은 보다 한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는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내용이 추상적인 탓인지, 아무리 철학책을 읽어도 여전히 이해하기엔 어렵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철학자들이 하는 말은 어렵거나 공허하게만 느껴졌고, 굳이 철학자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려고 책을 읽는게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던 차에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서강대 최진석 교수가 쓴 '탁월한 사유의 시선'이라는 책이다.

일반인이 어떻게 철학을 대해야 하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한다. 몇 가지 텍스트를 살펴보면,

출처: 리디북스


"문제를 철학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철학이지, 철학적으로 해결된 문제의 결과들을 답습하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특히 철학 수입국인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예민한 경각심을 가지고 숙고해야 할 주제입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철학자들 누구도 다른 누군가를 닮기 위해서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만의 시선으로 자기처럼 산 사람들입니다."
"철학은 믿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탈레스가 최초의 철학자라는 것은 인간 가운데 탈레스가 최초로 믿음에서 이탈하여 비교적 근본적이고도 높은 수준의 생각을 했다는 뜻이죠. 만물의 근원을 신이라고 믿던 시대에는 신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그 신들의 이야기가 매개자를 통해 인간에게 전달되었고, 인간은 그것을 두려움 속에서 믿으며, 그 속에서 계시를 발견하려고 애썼습니다. 이때 신들의 이야기는 ‘신화’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탈레스가 신들의 계시나 믿음에서 이탈하여 ‘생각’을 했다는 것은 곧 ‘신화’의 중심적인 역할로부터 이탈했다는 뜻입니다. 비로소 ‘철학’이 시작된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탈레스를 최초의 철학자, 철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컴퓨터가 발명되자 어떤 사람은 그 컴퓨터를 사용하고 소유하는 일에 빠집니다. 또 어떤 사람은 컴퓨터의 사용보다도 그 컴퓨터로 인해 전개될 새로운 변화의 맥락이나 달라질 사회의 흐름에 더 큰 관심을 갖습니다. 역시 후자가 더 철학적 시선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의 내용은 일관된 메시지를 준다. 장자, 칸트의 생각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꽤나 휩쓸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정답을 그저 찾아내는데만 혈안이 되어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정작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놓친 것은 아닐까? 데카르트는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를 더 높은 사유의 시선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누가 말했는지를 아는 것에 집중한다.


주객이 전도되었다. 


어제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무죄판결로 인터넷 커뮤니티는 찬/반 양론으로 갈렸다. 몇몇 댓글을 읽어봐도 즉흥적인 반응밖에 없었다. 언론은 자극적인 기사 제목만을 쏟아냈다. 최진석 교수의 말처럼 더 높은 사유의 시선으로 사안을 바라보는 노력은 부족해 보였다.


어제자 뉴스 제목이다

"권력형 성범죄에 면허내준 꼴, 들끓는 여성계"
"피해자 침묵 강요, 사법부가 적폐"
"김지은씨, 당당히 살아남아 범죄 증명할 것, 항소의지"


문제의 쟁점은 무엇일까? 위의 사안에서 우리가 놓친 부분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는 앞으로 어떤 대안을 마련해 나아가야 할까?를 진지하게 다룬 기사는 찾기 어려웠다.


지금이 '클릭의 시대'(클릭을 통해 돈을 벌어먹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언론의 존재이유는 정확한 정보 전달과, 다양한 관점의 제시일 터인데, 그 역할을 전혀 해내지 못하는 것 같다. 사회 갈등만 증폭시킨다. 자극적인 제목, 부분적인 사실 전달, 편파적인 보도로 기사 댓글은 감정을 배설하는 창구로써만 기능한다.


언론이 제 기능을 잃은 이상, 답은 하나다. 우리같은 시민들이 철학하는 법을 배울 수 밖에. 철학이 어렵게만 다가왔다면, 이 책으로부터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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