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의 초코식빵
며칠째 비가 계속되자 불안했다.
불안한 마음과 얼굴을 감추려고 괜히 음악을 크게 틀거나
장대비가 내리는데도 집 앞 마트를 다녀오겠다고 골프우산을 들고 나갔다 오기도 했다.
집안에서 TV 뉴스를 틀어놓고 비 오는 창밖을 바라보는 것과
우산을 받쳐 들고 실제의 비를 받아내며 걷는 것은 아주 다르다.
조금은 불안감이 떨쳐진다.
다만 나의 두발이 밟는 이 빗물은 아직 찰랑찰랑 신발을 적실 정도이니 뉴스를 지배하고 있는 저 남쪽 지방의 비는 내 것이 아니야.
아주 이기적 안도감.
방에 돌아와 선택한 음악은 몇 년 전쯤 개봉했던 뮤지컬 영화 미녀와 야수의 O.S.T였다.
엠마 왓슨의 또랑또랑한 이목구비와 목소리에 감동하며 봤던 영화였다.
그녀의 똑 부러진 영국식 발음과 청량한 목소리가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적어도 영화를 보는 두어 시간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화면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그래
오늘은 빵을 만들자
라고 생각한 건 빗소리가 조금은 잦아들 무렵이었다.
그 비를 맞고 다녀온 작은 마트에서 1kg짜리 강력분을 집어 들 때 이미 계획했다.
작은 AI스피커에서 야수의 성에 사는 주전자와 찻잔들의 노래가 울려 퍼질 때
빵 만들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아주 어울리는 행동이었어.
그동안 집에 밀가루가 똑 떨어진 이후로 베이킹을 잠시 잊었었다.
지난주 도서관에서 들고 온 기욤 뮈소의 책들로 시간여행을 하며 내 시간을 죽이고 있기만 했었지.
나는 책장 옆 구석자리에 박혀있던 믹싱기를 꺼내고 계량을 하고 반죽을 하기 시작했다.
빵을 만드는 것이 마치
공부하는 것과도 같아서
책상에 앉는 그 시작이 어렵듯이
믹싱기를 꺼내는 그 동작이
나에겐 가장 어려웠다.
비좁은 나의 부엌엔 묵직하고 시끄러운 베이킹용 테이블 믹서가 올라갈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항상 책장과 창문 사이의 작은 틈에 보이니 않게 들어가 있는 나의 소중한 믹싱기.
반죽이 끝나고 발효를 시작했다.
몇 년 전 작업실을 접으며 중고로 넘겼던 작은 나의 첫 발효기가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상관없다. 집에서도 발효기 없이 여러 가지 빵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특히나 요즘 같은 여름 장마철에는
발효기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
이것은 불행인 건지, 우리나라의 여름은 빵 발효의 최적화 온 습도로 변해버렸다.
1시간가량 1차 발효가 완성되었다. 반죽은 3배로 불어나 있고 그 안은 가스로 가득 차 있어서 바늘 하나 찌르면 공기가 푹 꺼질 것 같지만,
사실 손가락을 하나 찔러 넣으면 그 자국만 남을 뿐 전혀 모양의 변화가 없다. 이것이 잘 된 1차 발효다.
커다란 실리콘 매트를 깔고 밀가루를 흩뿌리고 반죽은 꺼내 공기를 뺀다. 피식피식 누군가 싱겁게 웃는 소리가 난다. 난 이 소리가 즐겁다.
12개의 작은 공을 만들어 중간 발효를 한다. 비닐 아래서 다시 공기를 머금은 동그라미 12개를 다시 굴려 팬에 담아 2차 발효를 시작한다. 그렇게 또 한 시간쯤 후에 오븐에 들어갈 수 있다.
실내온도 26도와 함께 습도도 높아서인지 뜨거운 물을 받아 온도를 올려주지 않아도 팬 안의 반죽들은 솔솔 잘도 부풀어 이미 예열한 오븐에 들어가 다시 터질 듯 부풀어 드디어 식빵이 완성되었다.
여전히 비는 강약을 반복하며 주룩주룩 내리고
집안에는 진한 초코향이 가득한 빵 냄새가 진동을 한다.
이 순간이 가장 보람이 솟아난다.
3시간을 공들인 자만이 맡을 수 있는 향기.
이제 오늘 나에게 위안과 힐링을 가져다준 초코식빵 세 덩어리의 갈길을 정해야지.
하나는 뜯어먹고
두 개는 냉동실로 향할지,
얌전하게 포장되어 누구에게 갈지.
사실 나는 케이크, 쿠키, 구움 과자 등이 전공인 파티셰인 듯한데
집에서는 이렇게 가끔 빵을 굽는 브랑제가 되어 나를 위로한다.
고마워
오늘의 초코식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