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백수 가족의 여유

by 박모카

20일 후에 귀국 비행기가 예약되어있다. 그 전에는 시간이 잘 가지 않았는데, 디데이 한 달 전부터는 물흐르듯이 흐른다. 밴쿠버에 여름이 뒤늦게 찾아오고 있다. 해바라기 축제며, 놀이공원이며. 여름은 6월부터인줄 알았지만 밴쿠버의 여름은 8월부터 천천히 시작된다. 덕분에 볼거리 갈거리가 많다. 둘째도 개월수가 많아지며 점차 튼튼해진 덕분에, 차타고 다니는 것이 조금은 안심이 된다.


어제는 해바라기 밭에 갔다. 해질녁에 가니, 꽃이 모두 나를 등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뭔가 서운하다고 해야하나, 빈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하여튼 뭔가가 아쉬웠다. 꽃이 모두 우리를 등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낮에 해가 떠있었을 방향으로 몸을 돌리니 그제서야 해바라기가 우리 가족을 맞아주었다. 웃겼다. 관객이 비록 한낮 꽃이라고 해도, 그들의 관심을 받으니 나에게 생기가 도는 사실이 웃겼다. 해바라기 관중을 배경으로 무대의 주인공 연습을 몇 번 하고 나니, 해바라기 하나 하나를 찬찬히 보는 여유도 생겼다. 아기 해바라기가 귀엽고 예뻤다. 크고 우람한 해바라기, 시들어버린 해바라기를 하나씩 보며 밭 한가운데 그네에 앉았다. 더 여유를 부리며 시간을 펑펑 쓰고 싶었지만 체질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쌀쌀해진 바람이 신경쓰여, 둘째가 감기 걸릴까봐 얼른 차로 돌아왔다.


막상 귀국하려니 이제서야 밴쿠버를 즐길 줄 알게된 것 같아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처음에는 도시로만 다니며 아이에게는 관심이 없는 신문물 위주의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농장도 다니며 자연을 최대한 맛본다. 아기의 평생 친구로 자연을 매일 돌아다니는 삶은 어떨까 상상을 해보았다. 어른인 나의 입장에서는 사회와 연결이 희미해질수록 내 삶의 의미도 퇴색되는 것 같아, 사람들과 다시 연결되는 무언가의 일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주로 가서 박사를 하는 것은 꼬맹이가 있는 우리 가족에게 굉장히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까지도 꾸준히 이력서를 돌렸다. 한 번 경력 단절이 된 나에게는 본 전공 취업의 기회가 n년째 찾아오지 않고 있다. 취업을 정말 하고 싶어서 자기소개서를 3시간동안 정성들여서 썼다. 솔직히 말해 취업이 계속 되지 않으면 공부를 더 하는 것 말고는 다른 옵션이 없다. 참고로 지금은 창업에 대한 생각이 없다.)


아기에게 집중하면서 사는 삶은 기쁘기도 하지만 지치기도 한다. 퇴근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깜깜한 밤이 늦으면, 아기가 깊이 잠들어 비로소 내 시간이 오기는 한다. 꽤 높은 확률로 매일 밤, 침대안에 꽁꽁 숨어서 새벽 해가 뜰때까지 글을 쓰고 놀고 싶은 충동과 나는 싸운다. 하지만 부모가 되었기에 아기가 아침 일찍 눈을 떠서 좋은아침노래를 부르면 밤 늦게 자지 않았던 대가를 피눈물 흘리며 갚아야 한다. 그래서인지 남편과 둘이서 육아를 하며 출근을 하지 않고 오로지 아기 둘과 놀고 있어도 매일 피곤하다.


한편, 남편도 한국으로 돌아가면 자기만의 작업시간을 가지고 싶어, 이런 저런 상상을 하는 것 같다. 밴쿠버의 자연도, 한국에서의 자유도 모두 반가운 마음이다.


오늘은 벤쿠버에서 만난 각별한 친구를 만나고 왔다. 둘 다 다른 곳에 살다가 온 이방인이었기에 낯선 땅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았다. 그의 여자친구도 드디어 밴쿠버에 놀러왔고, 나의 남편과 아이들도 함께했다. 처음 친구랑 같이 살 때에는 개인이었지만 이제는 가족 단위가 되어 다시 만났다. 없는 살림에 최대한 잘 맞이해주기 위해 노래도 틀어놓고 좋은 향도 피워놓은 그가 고마웠다. 타지에서 정을 나누어 기뻤다. 아마 모자란 상황에서 나누는 것이라 더 특별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매거진의 이전글좋은게 좋은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