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알림: 본 화의 내용은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각색되었습니다**
미국은 의료가 비싸기로 유명하다. 응급실에 가서 통증약 하나 먹으면 얼마, 저거 하면 얼마.. 심지어 물 마시는 것 까지 청구하니 물도 마시지 말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수술 한 번 받으면 억대의 돈이 나와서 삶 자체가 망가져버린다는, 내 머릿속으로는 상상하지 못할 나라다. 이런 나라에서도, 공공 의료 성격의 보험이 있다. 저소득층 등, 도움이 필요한 곳에 구세주같은 A보험이다. 이 보험을 받던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보험 중지가 되었다는 문서를 받고 싶어요."
들은 내용이 맞나 싶었다. 보통은 보험이 시작되었다는 문서를 받고 싶어 할 텐데.. 왜 반대로 말하시는걸까? 실수로 잘 못 말하신 것은 아닐까?
알고보니, 지금 이 할아버지께서 전화를 거신 곳은 B 보험 회사였다. 원래는 A 보험 수급자이셨는데, 회사에서 일할 기회가 생기면서 회사에서 B 보험을 들어주었다. 이에 따라 기본 보험으로 B 보험이 세팅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주치의로부터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었다.
"수술해야 합니다."
여태 아파왔던 무릎이 더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한동안 일을 나가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지만 큰 결심을 했다. 몸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수술을 하려고 보니 막상 B 보험에서 제공하는 커버가 턱없이 부족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공공 보험인 A 보험을 쓸려면, B 보험이 없어야 한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한 달 한 달 시간이 흘렀다. 할아버지 몸은 점점 더 아파왔다. 주치의는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아픔이 몸을 타고 올라와 팔까지 손상이 갈 것이라고 주의를 줬다. 더이상은 시간을 흘려보낼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B 보험을 중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였다. 그것은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소중하게, 어렵게, 유일하게 얻은 직장을 그만두기로 했다. 마음을 먹기까지 몇 달이 걸렸지만 이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표를 내고 나니 또 다른 산이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B 보험이 해지되는 날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B 보험이 해지되는 날은 또 몇 달 뒤였다. 할아버지는 인내의 한계를 느끼며 B 보험이 해지되는 날이, 본인이 해방되는 날임을 되내이고 되새겼다. 그리고 B 보험이 해지되던 날, 그는 병원에 찾아갔다. 바로 수술을 해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수술실 앞에서 돌아와야만 했다.
사유인즉슨, 병원에서 조회를 했을 때 B 보험이 살아있는 것으로 나온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할아버지가 재정적으로 부담해야할 병원비가 너무 커서, 할아버지 생전에는 차마 갚을 엄두도 나지 않는 금액이었다. 이사실은 병원도 알고 있었다. 돈을 수급하지 못할 것임을 알기에, 병원 측에서는 수술을 시켜줄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터덜터덜 무거운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집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늘 할아버지가 B 보험에 전화를 걸었다. 나는 통역사로 그 전화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전에도 이 일로 두 번 전화했어요. 그 때는 보험 해지서를 준다고 했는데 아직도 안와서 세 번째 전화를 했습니다."
수화기 건너편의 상담원은 간단한 업무에 시간을 많이 필요로 했다. 굼뜬 그녀의 이해가지 않는 행동에, 내가 할아버지의 사정을 설명해주니 "이해합니다. 어떤 상황인지 잘 알았어요. 최선을 다할게요"라고 했다. 적어도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하지만 정말 간단한 서류를 발급해주는 것 하나만 하면 되는데, 통화가 시작된 시간은 벌써 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며 돌아오겠다고 했다. 몇 십분 후, 조사를 하고 왔다는 그녀는 의외로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며 말꼬리를 잡기 시작했다. 통역사가 낀 상황에서는 참 난감한 상황이었다. 직역을 했으면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단서라도 보일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까 통역한 내용을 언급하며 "이전 회사에서 발급해준다고 말했잖아요? 할아버지는 서류 청구를 전 회사에 해야합니다."라고 했다. 보험이 끝났다는 서류는 해당 보험회사에 요청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 관계도 없는 할아버지 회사랑 얘기를 하라니. 그냥 핑퐁처럼 상대 기관으로 보내서 지금 상담을 얼른 끝내려는 임시방편적인 태도였다. 결국에는 내가 통역을 잘못했으니 그냥 서류를 발급해주면 안 되냐고 개인적으로 부탁을 하기도 했다. 아까 내가 뭐라고 했던 그것은 잊어달라고 했다. 상담원은 냉정하게도, "이해합니다. 무슨 상황인지 알아요. 하지만 서류 청구는 할아버지 전 회사에 해야해요."라며 말을 계속 반복했다.
상담원의 태도에 화가 났던 것은 나였다. 할아버지는 침착한 온도를 주욱 유지하셨다. 그는 상대를 공격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최후의 수단을 썼다. 바로 상담원의 ID를 받아 놓으라고 할아버지께 귀띔을 해드린 것이다. (참고로 우리 서비스직의 경우, 컴플레인 들어오는 것이 일하면서 생길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다.) 할아버지께서 이름과 ID를 요청하자, 그녀는 이를 알려주지 않으려고 말을 돌렸다. 목소리가 시무룩해진 것이, 그림자가 눈 앞에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대신 알아보고 다시 전화를 주겠다며 할아버지를 회유했다. (외국 상담센터는 전화를 주겠다고 하고 전화를 하지 않거나, 서류를 주겠다고 하고 서류를 주지 않는 등 프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때가 종종 있다.) 할아버지는 "누구의 전화를 기다릴 것인지는 알아야지요~"라며 마지막 바둑돌을 놓았다. 그러자 그녀는 울며 겨자먹기로 자기 이름을 천천히 불렀다. 스펠링을 이상하게 알려주는 바람에 4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우리의 전화도 그렇게 끝이 났다. 긴 통화에 나도 지쳐서, 자기 위해 자리에 누웠다. 삼십분이 흘렀다. 계속 할아버지가 머리에 맴맴 돌았다. '거친 외국에서, 아무도 나를 책임져주지 않는 타지의 땅에서 그렇게 사시면 안되는데..' 몸을 뒤척였다. 할아버지가 앞으로 어찌되실지 걱정이 되었다.
다음 날이었다. 어제 그 할아버지의 콜이 들어왔다. 어느 누구보다 더 반가웠다. 할아버지는 그 날 있었던 일을 알려주셨다. 할아버지의 높은 격식이 추후 큰 도움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담원이 '할아버지는 이전 회사랑 얘기해야한다'는 말만 반복했을 때, 할아버지께서 화를 내지 않고 잔잔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격식이 높은 태도였다.
상담원은 전화를 끊은 이후, 이것에 대해 더 조사하기로 했다. 사실 다른 상담원들처럼 할아버지에게 약속을 해놓고 도망갈수도 있는 상황이었을테다. 하지만 그녀는 따뜻했던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궂은 일을 했다. 그들의 정서로서는 본인의 일에 알파를 더 해서 업무를 수행하는 느낌이었다. 파헤쳐보니 모든 일은 이전 회사가 일처리를 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었다. 할아버지가 3개월 전에 퇴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퇴사 처리가 아직도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진정한 일꾼임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삐딱한 시선으로 보았을 때에는 그녀가 말도 안되는 고집을 부리며 할아버지를 내치려고 한다고 오해했었다. 하지만 그녀만이 할아버지를 진정으로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이제 원인을 알았으니, 할아버지는 곧 수술을 받을 수 있을터였다. 참 기품이 있는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