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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건강 Oct 05. 2020

나의 옛 집, 나의 할머니의 기억

by 배뚱뚱이

필자는 어렸을 때 할머니랑 함께 살았던 덕분에 나의 어렸을 때의 추억내가 썼던 방내가 다녔던 학교이런 모든 기억이 서울의 복판에 있는 한 아파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시골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의 어렴풋한 추억이 아닌생생하게 살아있는 내 초등학교 (당시는 국민학교)의 기억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집이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이었다늘 명절마다 필자가 엄마한테 등짝을 맞아가며 수학 문제집을 풀었던 방에 가서 나의 아들과 딸을 데리고 낮잠을 재우고아이가 크니 여기가 아빠 어렸을 때 다니던 학교문방구” 이런 말을 하면서 아이들과 동네를 돌아다니는 일은 매우 즐거운 명절의 할 일이었다


# 집안의 유일한 의사, 할머니의 치매 초기 증상을 가족에게 알려야 할까?

할머니랑 함께 살았던 유이한 (동생과 나) 손자이다 보니 할머니는 나와 동생에 대하여 정말 많은 것을 기억하고 계셨다. 생일은 기본이고, 몇 학년 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 그 당시 우리 집에 있었던 포니 승용차의 차량번호, 워낙 기억력이 좋으셨던 할머니이다 보니 심지어는 2010년생인 첫 손주인 우리 큰아이의 생년월일까지도 너무나도 잘 기억하고 계셨다. 


친척들이 모이면 다들 할머니의 이런 시시콜콜한 기억의 소환에 대해서 감탄하며, “우리 어머니는 아직도 기억이 쌩쌩하셔”, “치매는 우리 할머니한테는 없을 것 같아, 그렇지 xx(필자의 이름)야?”라고 말씀하시지만 우리 할머니가 영원히 기억 못 하시는 이름과 생일, 바로 우리 둘째 아이의 이름과 생일이다. 2015년생인 둘째가 태어났을 때 할머니는 만 87세, 살아 계셔서 우리 아기를 눈에 담아 두시는 것 만 하더라도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었지만, 할머니는 단 한 번도 우리 둘째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신 적이 없었다. 


치매의 가장 초기 증상, ‘최근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치매의 초기 증상이었다. 새로운 지식이 더 이상 쌓이지 않는 그 증상을 확인하고, 나는 큰 고민에 빠졌다. “이걸 다른 분들께 알려야 할까?” 집안의 유일한 의사로서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 필요할까? 결국은 이 고민은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혼자만의 고민으로 남게 되었다. 


# 치매가 무서운 이유는 치매를 노화의 현상이라 생각하는 인식

 우리는 흔히 치매를 전형적인 노인성 질환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치매는 그 자체가 질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인지 기능 장애가 동반된 상태를 의미하는 포괄적인 용어이다. 이 중에 우리가 노인에게 치매라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 알츠하이머병(Alzheimer disease)을 의미한다. 


 이 병이 무서운 이유는 치매는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노화의 상징과 같이 여기기 때문에 본인이 병식(내가 이 병을 가지고 있다는 인지)을 가지고 있더라도 절대 본인이 먼저 그러한 증상이 있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많은 환자들에서 조기에 적극적인 중재가 이루어지지 않고, 명확하게 생활에 문제가 나타나는 순간이 되어서야 보호자들이 인지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가스레인지의 냄비를 태우는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고, 도어락의 바뀐 비밀번호를 몰라 집에 들어가시지 못하는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다. 


현재까지의 약제로는 치매 증상을 되돌리는 약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나빠지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치료 목표다. 그래서 진단이 빠르면 빠를수록 일상적인 생활을 (ADL: Activities of daily living) 유지하게 되고 보호자인 가족들과 본인 모두에게 행복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만약 필자의 할머니께서 훨씬 젊으실 때에 이러한 증상 (새 손주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을 보이셨다면, 필자는 분명히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으시도록 했을 것이다. 


# 손주들의 생일을 다 기억하는데 치매일 수가 없지?

치매는 노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질환 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어르신 앞에서는 언급조차 금기 시 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다 보니, 보호자들도 초기 증상이 의심될 때에 정확하게 환자에게 직언을 하지 못하고, “거봐, 저렇게 모든 손주들 생일 다 기억하는데 치매일 수가 없지”라는 식으로 치매의 증상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부인하는 경우가 많다. 환자 본인을 위해서 던진 말이지만 오히려 치료의 최적의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설날에 그런 증상을 보이셨다면 다음 추석에는 더 악화될 수는 있어도 더 나아지는 경우는 없다는 것을 잘 알아두셨으면 좋겠다. 이런 특성 때문에, 정부에서 그 많은 예산을 들여가며 ‘치매 조기 검진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무작위 조기 검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치료의 연계이지만……)


필자는 살을 빼기 위해서 달리기를 하고, 답답한 것이 싫어서 보통 운동장보다는 시가지를 달리는 것을 선호한다. 지난 주말에는 그렇게 뛰어가다가 마침 15개월 만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예전 할머니와 함께 살던 아파트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1983년 준공 이후 줄곧 살구색 (80년대 H건설이 지은 아파트의 대표적 색깔, 야쿠르트같은) 아파트였는데 처음으로 회색과 파란색의 조합으로 아파트를 새롭게 칠해 놓았다. 만약 할머니께서 살아 계셨다면, 이 아파트를 보고 당신의 집을 찾지 못하고 헤매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롭게 바뀐 아파트 색깔을 기억하지 못하실 수도 있으니…… (물론 신경과 선생님들이 보기에 나의 이러한 생각은 의학적 근거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치매는 미리 막아야 하는 병이고 그것이 최선인 병이며, 주변 가족들의 세심한 관심으로 조기에 발견할 수 있는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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