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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Aug 09. 2020

옥상 위의 수영장

싱가포르가 좋아지는 순간   

아침에 세수를 하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한숨이 나왔다. 눈 아래에는 거뭇하게 그림자가 지고, 얼굴이 퉁퉁 부었다. 밤늦게까지 보고서를 쓰느라 저녁을 늦게 먹었고,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답답한 마음에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룬 탓이다. 혼자 싱가포르로 건너와 일하면서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는 점이다. 첨예하게 서로의 이해가 갈등하는 회의 시간, 어떤 결론에도 합의를 보지 못한 채 오늘도 모호하게 끝나버렸다. 퍽퍽한 고구마를 먹은 듯 답답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마음처럼 쉽지 않은 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내 작은 몸 하나를 건사하는 거다. 사회인의 옷을 벗고, 모든 역할들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갓 태어난,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 뭉친 목과 찌푸린 이마를 풀어주고, 충혈된 눈을 진정시키는 것. 무엇보다도 깊게 숨을 쉬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모니터와 키보드로부터 도망쳐 새로운 세계로 진입해야 할 시간이다. 답은 우리 집 옥상 위에 숨어 있다.      


오후 1시. 점심시간에 짬을 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콘도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싱가포르 도심의 전경이 펼쳐지는 옥상의 가운데, 작은 수영장이 있다. 잔잔히 넘치는 물이 마치 건물 밖 도시로 떨어질 것만 같다. 하늘이 보이는 곳에서 수영을 한다는 것은 구름의 모양을 구별하는 법을 배운다는 뜻이기도 하다. 통통한 솜덩어리 같은 구름, 하얀 코코넛 과육을 개어놓은 것 같은 고적운, 양 떼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 같은 구름, 솜사탕 한 겹을 떼어낸 것 같은 구름. 태양 아래 배를 드러내고 한 팔씩 휘저으며 천천히 나아갈 때면, 나는 카약 보트가 되어 팔로 노를 젓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흐릿해지는 것 같달까. 발을 몇 번씩 구를 떼마다 파노라마처럼 다른 하늘의 모습들이 펼쳐졌다. 한낮 여름의 수영장은, 하늘 아래에 수많은 파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남자 아기의 옷에 사용될 것 같은 연한 파란색의 하늘, 눈을 감아도 생각날 것 같은 쨍한 코발트 블루의 수영장 타일은 멀리서 보면 옥색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너울지는 수영장의 잔잔한 물결위로 햇빛이 쏟아졌다. 물의 파동에 따라 햇빛이 반사되는 모양이 변하면서, 수면에 그려지는 그림도 조금씩 달라졌다. 거북이의 등짝이 갈라진 모양이기도 하고, 갈매기가 날아가는 것 같은 무늬들이 일렁거리기도 했다. 처음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2년 전 봄, 지금의 회사에 막 입사했을 때였다. 당시 나는 매주 월, 수, 금요일이면  퇴근 후에 수영장으로 쪼르르 달려가곤 했다.  회사에서 찌든 마음을 벗고 물 속으로 풍덩 빠져드는 게 좋았고, 무엇보다 다른 회원들과 꼬리를 물며 정신없이 헤엄치다보면 회사 생각을 잊어 버릴 수 있었다. 초급 레인에서 열심히 물을 먹고 있던 내 옆으로, 쉼없이 5바퀴씩 뺑뺑이를 돌리는 날쌘 중급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가볍게 날아올라 수면을 헤치고  빠르게 앞질러 나갔다. 머리카락 한 올 없이 수모로 꼼꼼히 가린 모습과 현란한 수영복에서 엄청난 고단수들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일요일에 하는 자유 수영 시간을 가장 좋아했는데, 지하에 위치한 수영장의 높은 창문 너머로 햇빛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일요일 3시쯤 수영장에 가면 햇빛이 수영장을 찬란하게 내리쬐곤 했거든. 그러면 파란색 타일에 비친 물빛에 햇빛 반사되서 반짝거리는데 얼마나 황홀한지 몰랐다. 마치 물 속에 노란 조명을 비추는 것 같은 광경을 맘껏 볼 수 있음에 행복했다.. 한참을 물고기처럼 첨벙 대다가 쪼글쪼글해진 손끝에 웃음이 나왔다.      

 

동네 스포츠 센터의 수영장이 신체 단련의 장이라면 싱가포르 콘도의 수영장은 마치 휴가 때 만날 수 있는 리조트 같다. 레인을 가르는 꼬불꼬불한 줄도 없고, 열명 남짓의 학생들이 줄을 지어 돌고래처럼 빠르게 수영장을 돌지도 않는다. 20m 가량으로 길게 펼쳐진 풀을 유유히 헤엄치는 사람들과 물장구 치며 꺅꺅거리는 아이들은 마치 지금 여름 휴가를 온 기분에 젖게 한다. 쉴 새 없이 따뜻하고 풍요로운 햇빛이 쏟아지고, 도심임에도 불구하고 옥상에는 고요함이 흘렀다. 잎이 넓은 열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이 귀를 자극했다. 유유 자적. 낙원이 있다면 이런 곳이겠지. 왼쪽 팔로 물을 밀어내고, 오른팔로 자유형을 하며 얼굴을 내밀고 숨을 쉬었다. 자유형을 하면서는 한번도 본 적 없었던 하늘이었다. 1년 전만 해도 익숙했던 파리한 형광등 빛이 눈을 부시게 하는 하얀 천장이 아니라, 말간 구름과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이 유유히 시야를 지나가고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다시 물 속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파란 타일의 색으로 물든 수심의 세계가 펼쳐졌다. 몸을 곧게 펴고 내가 물결의 일부가 된 것처럼 머리, 가슴, 허리, 그리고 다리로 이어지는 곡선을 만들며 앞으로 나아갔다. 물속에서 나는 아무 것도 없었다. 성과도, 승진도, 인정 받고 싶은 마음도 흐릿해졌다. 그저 호흡과 움직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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