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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Aug 16. 2020

비오는 날을 좋아해

한달 전만 해도, 싱가포르는 3일에 한 번은 비가 내리곤 했어추적추적 내리는 게 아니라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쏴아 하고 말이야. 신기하게 싱가포르에는 지렁이가 많지 않아한국에서는 비오는 다음 날 지렁이를 피하느라 폴짝 폴짝 스텝을 밟곤 했거든도로가 포장된 탓인지 그마저도 요즈음은 잘 안보이긴 하지만

 

'투둑투두둑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어느지막이 9시에 일어나는 나지만 오늘은 빗소리에 일찍이 잠에서 깼지


비를 좋아하니나는 비가 오는 날을 참 좋아해세상이 멈추는 기분이거든.저 높은 구름에서 부터 쏟아지는 비를 눈으로 좇다보면 시야가 아득해지지. 내가 작아지고 작아져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우르르 쾅쾅하고 천둥번개가 내리치는 날이면 조금은 엄마가 보고 싶어져. 그릇들이 달그락 거리며 부딪히는 설거지 하는 소리아빠가 틀어놓은 TV 소리가 그립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균일한 간격으로 툭, 툭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다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 마치 아기의 등을 토닥여주는 엄마의 손길처럼 말이야. 


지난 여름에는 엄마와 제주도에서 여름 휴가를 보냈어. 일주일 내내 비가 오는 바람에 제약이 많은 여행이었어. 바다에 발을 담그고 첨벙 거릴 때에도 우산을 써야했고, 안개가 자욱한 사려니 숲길을 걸을 때에도 땅이 질퍽거렸거든. 벼르고 벼르다 성산 일출봉을 가려고 집을 나선 날에는 폭우가 쏟아져서 미술관으로 발길을 돌렸지. 맑게 개었다가도 10분 정도 지나서는 먹구름이 밀려와 비를 뿌려대서, 집으로 가는 길 공항 버스 창밖에서야 쨍한 하늘을 볼 수 있었어. 혹시나 제주를 여행할 계획이 있다면, 8월의 제주는 이렇게변덕스럽다는 걸 알아 두길 바라. 


일주일 간의 휴가가 궂은 날씨로 엉망이 된 기분이었지만, 지금도 액자에 간직하고 싶은 추억으로 남은 순간이 있어. 월정리 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돌담길, 어느 2층에 자리한 독립서점에서 이야기는 시작해. 


잠시 엄마와 헤어져서 월정리 해수욕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날이었어. 하루는 각자의 시간을 가지고 하고 싶은 것을 해보기로 했거든. 에메랄드 빛 월정리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바닷가의 카페에서 2시간을 하염없이 바다를 보고 책을 읽었어. 지겨워질 무렵 다시 숙소로 돌아가려고 정류장을 향해 걸었지. 뜬금없이 화장실이 너무 가고 싶은거야. 숙소까지 참아볼까 고민을 하다가 길 왼 편에 자리한 서점이 눈에 띄었어. 2층의 서점이더라구. 커튼을 치고 있어서 실제로 영업을 하는 지도 미지수였어. '손님은 어떻게 모으려고 2층에 서점을 지었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 마침 책을 사고 싶기도 했고, 제주도의 서점이 궁금해져서 2층으로 올라갔어. 화장실도 쓸 겸, 마땅한 책이 없으면 얇은 책 한 권이라도 사려는 심산으로 말이야. 



잠깐 화장실을 쓰고 책을 골라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했어. 볼일을 마치고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내부를 둘러보았지. 20평 정도 되보이는크지 않은 서점이었는데, 막 문을 연 곳 같더라고. 도서관의 것을 연상시키는 앞뒤가 뚫린 책장들이 4개 정도 나란히 정렬되어 있었어. 아주 천천히 책등을 훑었지. 보유한 책이 한정적인 독립서점에서는 마음에 드는 책을 찾기 힘든 경우도 많아. 흥미롭게도 그곳에는 내 마음을 읽은 듯,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들이 많았어. 그렇지만 20인치 캐리어 하나만 들고와서 2권 이상은 못 살 것 같더라고. 그렇게 고심을 하고 있는데, 40대 정도로 보이는 호리호리한 체격의 여자 주인이 내게 말을 건넸어. 


'비가 정말 많이 오네요. 여행 오신 거에요?'


비오는 날 책을 고르고 또 고르는 손님이 달갑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텐데, 편히 앉아서 고르라며 소파에 앉길 권했지. 소파에 앉아 방을 둘러봤어. 가지런히 정리된 책들과 대칭을 이루는 가구의 배열에서. 주인의 섬세한 손끝과 공간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어. 


'따뜻한 레몬 녹차 어떠세요?'


아직 책을 사지도 않았던 지라 주인의 호의에 조금은 놀랐어. 그렇게 서점에서만 2시간을 보내고 말았어. 쏟아지는 비도 좋은 구실이었지만, 제주의 바다와 관광 명소들보다도 그 작은 서점이 포근하고 안온하고 특별하게 느껴졌거든. 주인은 전기 포트에 물을 끓이고 예쁜 머그잔에 따뜻한 녹차를 가득 내주었어. 씁쓰름하지 않고 향긋하고 상큼한 차였어. 바닷 바람에 조금 차게 식었었던 몸을 녹이며 컵을 만지작 거렸어. 아직도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고 빗방울이 만들어내는 균일하고도 작은 진동은 은은하게 서점을 채웠어. 시간을 멈추고 싶다고 생각했어. 여행을 할 때, 멈춰서 액자에 보관하고 싶은 그런 순간을 만나지 않아? 그 때가 꼭 그랬어. 

 

나는 서점 주인이 궁금해져서 주인에게 물었지. '추천하시는 책이 있으신가요?' 

그녀는 말을 아꼈어. 대신 내가 어떤 책을 좋아하는 지 물었지. 그리고 우리는 이승우, 서머싯 몸 등 좋아하는 작가와 책들을 주고 받기 시작했어. 사회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점점 낯선 사람들과 대화를 주고 받는 게 소모적이라고 느끼곤 해. 그런데 이상하게 서점 주인과 이야기하면서 나의 수다스러움에 깜짝 놀랐어. 책에 대한 애정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반가움에 경계심이 풀려버렸지. 사실 그날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서점을 채운 빗소리와 바깥 세상은 잊은 듯 서점과 책들만이 존재하는 듯 했던 느낌은 생생해. 


서점을 나와 세화리에 있는 숙소로 향했어. 숙소 근처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꺼냈지. 

'이제 서야 비가 그쳤네. 언제쯤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으려나?' 창밖을 바라 보며 생각했어. 갑자기 카페 밖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더니 한쪽으로 몰렸어.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무지개가 걸려있더라고. 주황색으로 어렴풋이 물든 저녁 노을을 뒤로 무지개가 떠있었어. 비의 선물을 받은 날 처럼 느껴졌어. 궂은 날씨로 오름은 가지 못했지만, 썩 괜찮은 하루였어. 



요즘 한국은 비가 많이 온다고 들었어. 비가 오는 날이면 재주소년의 '봄비가 내리는 제주 시청 어느 모퉁이의 자취방'에서 라는 곡을 들어봐. 지금 들리는 빗소리에 또 다른 빗소리의 선율이 겹쳐지는 순간을 만끽하게 될거야.  따뜻한 태양을 만끽 하기 힘든 요즘, 빗소리가 마음의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씻어주길 바라며 이만 줄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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