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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Aug 14. 2020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멍 때려도 괜찮아 

대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나는 밤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기숙사에 막 돌아와서 양말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룸메이트였던 동생 J  안쓰러운 표정으로 얼굴에 로션을 챱챱 바르며 말했다


"언니언니는 발소리에서도 바쁨이 느껴져.


20 초반의 나는 2kg 가까이 되는 노트북이 든 무거운 백팩을 매고 캠퍼스를 종종 거리던 모범생이었다. 수업과 아르바이트 들을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잠시 기숙사에서  때에도 알람은 10 이상을 맞추지 않았다불안했고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나는 수험 생활 동안 지망했던 대학 10개를 다 떨어지고 정말 가고 싶지 않았던 한 대학교에 합격 했는데, 우리 학교는 명문대 지방 캠퍼스였기 때문에 항상 본교와 비교하는 외부와 내부의 시선들이 많았다학교의 익명 온라인 게시판에는 자조적인 말들로 가득했다. '본교 사람들은  좋은 기회를 잡겠지'. '탄탄한 동문 네트워크 들이 사회에서 이끌어 줄거야우리는 들러리 같은 존재지'


해리 포터에는 '디멘터'라는 존재가 등장하는데이는 사람들의 영혼을 빨아먹는 어둠의 존재다. '너가 잘 되겠어?' 자기 비하를 넘어 자신의 친구들까지 할 수 없다고 단정짓는 목소리들은, 마치 해리포터에 나오는 디멘터 같았다. 나는 그들이 틀렸음을 증명해내기 위해서, 나를 몰아 붙였다. 남들이 내 가치를 정하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세계를 누비며 살고 싶었다. 그런 내 꿈을 이루고 스스로가 쓸모 있고 유능한 인간이라는 걸 보여 주는 것이, 나 자신에게도 최선의 삶을 선물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스로를 많이 밀어 붙였기에 생리가 끊길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다. 그래도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보내고 있으니 잘 될 거라고 마음에 위안을 삼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꽉찬 스케줄 표와 끝나지 않는 할일 들에 숨이 막혀 스트레스가 턱끝까지 차올랐다. 더는 버틸  없을  같았다무작정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했고바다가 있는 가장 가까운 도시인 강릉으로 가는 버스표를 끊었다가을  짙푸른 바다와 맑은 하늘  찬란한  앞에서 마음이 벅찼다. 새파란 바다가 보이는 카페의 테라스 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수평선을 쳐다보았다. 시집을 가져갔지만, 손은 같은 페이지에 머문 채 몇 시간이고 바다를 보았다.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가르면서 드넓은 경포호를 달리면서, 가슴이 뻥 뚫리는 해방감을 느꼈고 세상이 다시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 봄날, 강릉의 해변에서 

그때 깨달았다진정한 마음의 휴식은   침대가 아니라 내가 아무 생각도   없도록 아름다운 것을  앞에 펼쳐놓아야한다는 것을 말이다지금은 전소 되었지만바다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  하나인 나폴리아의 카페테리아에서 바로 앞에서 찰랑이는 바다를 보며  시간이고 멍을 때렸을 때. 시애틀에서 밴쿠버로 바닷길을 따라 달리는 암트랙 기차에서 일렁이며 떠오르는 해를 4시간 동안 지켜보았을 때, 포틀랜드의 동네 뒷산에서 저수지에 반짝이는 햇빛과 나른해져서 눈을 반쯤 감았던 순간. 낯설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접했던 '멍 때리기'의 순간들은 마음이 조급해지고 스스로가 작아질 때마다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탁 트인 풍경을 볼 수 없는 요즘, 지난 나날들을 돌이켜보며 생각한다. 그떄 몇 시간이고 아무 생각안하고 그저 자연을 눈에 담아두기 참 잘했다고. 아무 생각도, 아무 걱정도, 계획도 없이 그저 그 순간은 아름다움 앞에 나는 존재하고 있었다. 


포틀랜드의 어느 뒷동산에서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따르면, ' 때리기' 생산성과 창의성을 자극한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도 입증되었다미국의 신경과학자 마커스 라이클은 자기공명영상과 양전자 단층 촬영 기법을 이용해 멍하니 있을  유난히 활발해지는 뇌의 영역을 발견했다고 한다그가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 (이하 DMN) 라고 이름 붙인  영역은 뇌의 주요 신경망들을 연결하는 신경회로인데, DMN  활성화될때 우리는 의식무의식  뇌의 단편들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를 서로 연결할  있다이러한 상태에서 창의적인 조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죽은 왕녀와 파반느> 라는 소설에서는 어느 잠언집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 

이따끔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온 쪽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고 한다.

말을 쉬게 하려는 것도, 자신이 쉬려는 것도 아니었다. 

행여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려주는 배려였다. 

그리고 영혼이 곁에 왔다 싶으면 그제서야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어쩌면 ' 때리기' 너무 빨리 달리는 몸과 마음에영혼이 뒤쳐져 있을  영혼을 기다려 주는 것은 아닐까일과가 끝나는 매일 6시는 가장 설레이고도 행복한 시간이다.  '글쓰기' '춤' 그리고 '운동'까지. 회사원이 아니라 그냥 내가 되고 싶은 '' 위한 계획들을 빼곡히 채워놓았다. 하지만 의욕 넘치는 마음에  의지가 따라가지 못하는 날이면 포기하고 아파트 옥상으로 향한다지금 내가 누릴  있는   유일하게  트인 공간, 세상에서 가장 밝은 도시, 싱가포르의 밤이 펼쳐지는 곳에서 멍하니 도시의 별들을 좇는다꾸물꾸물 움직이는 자동차의 꽁무늬도 따라가보고, 저 멀리 보이는 우리 회사 빌딩에 몇 층이나 불이 켜져있나 세어도 보고, 저 멀리서 보이는 것은 관람차인가 잡념으로 머리를 굴려 본다. 허리가 조금 뻐근해질 때면 바닥에 드러누워 아주    밤하늘을 유영하 하얀 구름을 좇는다앞서 가는 마음을 잠시 멈춰 두고영혼이 따라올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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