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속의 요새, 포트 캐닝 공원에서
꿉꿉한 습기가 훅 끼치는 한여름의 밤이었다. 싱가포르 경영 대학 정류장에 내려 목적지를 찾았다. 아무리 찾아도 도무지 공원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 동네였다. 그때 몇 발자국 앞에 가파른 철제 계단이 보였다. 그래, 여기에 없다면 위쪽 어딘가에 있겠지.막연한 기대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제대로 왔구나. 마지막 계단을 밟자 넓은 공터와 함께 남산 공원을 연상케하는 언덕 길과 계단이 펼쳐졌다. 동산을 중심으로 완만하게 굽이지는 길을 따라 간간이 달리는 사람도 있었다. 포트는 영어로 '요새' 라는 뜻이다. 요새가 있기 때문에 포트 캐닝이라고 불리는데, 이전에는 Government Hill (정부의 언덕) 이라는 이름이었고, 혹자는 Bukit Larangan (부킷 라랑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부킷 라랑군은 싱가포르와 이웃한 국가인 말레이시아 말로, 숨겨진 언덕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어느 중세 시대에는 말레이 왕조가 지배하기도 했다.
요새라고 하면 외곽에 위치할 것 같지만, 이 역사적인 장소는 싱가포르의 상업 지구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동산을 내려오면 건너편 도로에 푸난이라는 대형 쇼핑몰이 있고, 성곽길에는 싱가포르 국립 박물관도 볼 수 있다. 그렇다보니 시민들을 위한 콘서트와 음악 공연이 열리기도 하는 곳이다. 지금은 코로나 19 의 영향 때문에 지금은 간간히 산책하는 사람들만 보였다.
짙은 푸른 색의 나무들은 어둠에 숨었지만 개구리의 울음과 함께 퍼지는 울창한 기운은 가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안을 화려하게 밝히는 조명들, 인공과 자연이 어우러져있다. 칠흙같은 밤과 나무는 함께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어둠에 가려진 자연은 더욱 신비롭게 느껴졌고, 드문드문 밤길을 밝히는 조명이 화려함을 더했다. 캐치볼을 해도 될 것 처럼 넓은 잔디밭을 지나 성곽길을 따라 걸었다. 한국의 자연은 겸손하고 유려한 느낌이라면 동남아의 자연은 강인한 생명력이 인상적이다. 고온다습하다보니 생물이 자라기 좋아서 그런게 아닐까? 굵게 뻗은 나무와 내 얼굴보다 큰 넓적한 떡잎들, 구불거리며 뻗어나가는 나뭇가지들에 가끔 넋을 읽곤 한다.
짧은 터널을 지나자 태국이나 캄보디아의 사원을 연상시키는 벽돌탑 두개가 나란히 길을 장식했다. 마치 원래 하나였던 벽돌탑을 반으로 갈라놓은 듯,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을 이루었다. 마치 길의 시작에서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여는 듯한 상상이 들었다.
우리는 그저 발길이 가는 데로 걸었다. 신기하게도 계속 새로운 길이 펼쳐졌다. 시내로 내려가는 성곽 길, 3층 짜리 포트 캐닝 호텔은 노란 조명과 함께 궁전 처럼 반짝였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연상시킬 정도로 온갖 형태의 사각형이 건물의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보통 테라스를 보여주지 않는 호텔과 달리, 복도를 따라 객실이 위치해 있었고 그 복도에는 화초들이 어우러져 생기를 더해주었다.
덥다. 습하다. 답답하다. 도대체 할 게 없다.
서울보다 조금 큰 싱가포르를 두고, 어떤 사람은 테마 파크 같은 도시라고 한다. 아무것도 없던 항구 도시에 쌓아 올린 나라 이다보니, 예술이 발달한 것도 아니고 다른 동남아 국가처럼 자랑할 만한 에메랄드 빛 바다도 없다. 신기하게도 이 지루한 도시에서 흥미를 거두려고 하면, 가끔 예쁜 낯을 보여준다. '이건 몰랐지?' 하는 것처럼 슬쩍 숨겨둔 매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세히 보아야 오래 보아야 예쁘다는 시처럼, 알아가려고 노력할 때, 싱가포르는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국토의 70% 가 산이고 아름다운 동해, 남해, 서해를 끼고 있는 한국과 비교하면 싱가포르의 자연은 아쉬운 구석이 많다. 그럼에도 싱가포르는 열대 우림의 자연과, 사람이 만들어낸 건축의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다.
3시간을 걷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뻗는다. 피로한 다리를 안고 쏟아지는 잠에 눈이 감겼다. 즐거운 모험이었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고 머리는 맑기 그지없었다. 가뿐한 마음으로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