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의 티타임 - twg 티 살롱에서
# 외로움과 불안함은 자꾸 나를 먹게 만들었다.
요즘 늦은 밤에 편의점에 들려 간식을 사 오는 일이 잦아졌다. 무료해서 혹은 울적해서 잠들기 어려운 날이면, 달달한 초콜릿 과자에 기분이 좋아지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별생각 없이 집어먹다 보면 순식간에 한 봉지가 비워진다. 속이 더부룩해서 잠을 못 드니 제대로 쉬지 못하고, 다음 날 아침에 피로가 쌓이는 악순환이 되었다. 먹지 말 걸, 다음 날 후회를 하다가도 동료의 까칠한 메일에 답장을 적느라 골몰하고 있으면, 단 것이 또 생각났다. 바삭한 과자 안에 초콜릿을 감싸고 있는 쿠키. 한입 베어 물면 초콜릿 안에 캐러멜이 입안에 퍼지는 달콤함이 간절해지는 것이다. 오늘 하루를 마치면 달달한 디저트를 먹겠다는 생각으로 참곤 했다. 월요일에 꽂힌 음식은 바로 스콘이었다
싱가포르는 빵순이에게는 아쉬움이 많은 나라다. 우선 맛있는 베이커리를 찾기가 힘들고, 소수의 유명 베이커리는 매우 비싸다. 제과의 종류도 크로와상, 크림빵 위주로 제한적이다. 저녁 6시 이후에는 대부분의 베이커리가 문을 닫아서, 어쩔 수 없이 오차드의 ION 몰에 위치한 TWG 티룸으로 향했다.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관광객이나 부자들이나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조금 비싸긴 하지만, 월요일을 잘 무리 한 나에게 선물하는 셈 치기로 했다.
#싱가포르의 자랑, TWG
오차드 ION 쇼핑몰 2층 중앙에는 TWG의 티 살롱이 자리하고 있다. 마치 얇은 종이를 말아서 벽을 쳐놓은 것처럼, 쇼핑몰 한가운데에 동그란 유리벽에 감싸진 카페다. 기둥과 투명한 외벽 곳곳에 수백 개의 차 농장에서 덖어진 수제차 틴 케이스들이 쌓여있다.
TWG는 800개가 넘는 차 농장에서 차를 수입하고 있고, 차를 생산하는 국가의 차들은 모두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차 전문가들이 매년 세계를 여행하면서 차를 샘플링 해오는데, 이런 영향 때문인지 2008년 8월 설립 이후로 싱가포르의 차 수출량이 2배로 증가했다고 한다. 메뉴판을 보면, 메뉴판을 빼곡히 채운 차들이 T4010 등 5자리 숫자로 코드화 되어 있다. 침/브런치/오후/저녁 등 시간대 별로 적절한 차가 분류되어 있는가 하면, 인도/중국/뉴질랜드 등 원산지별로도 나뉜다. 차뿐만 아니라 제과류, 식사, 칵테일, 아이스크림 등 차를 활용한 요리들을 선보이기도 한다.
# 티룸의 또 다른 매력은 메뉴판과 함께 나온 책 속에 있었다.
나는 이 날 읽고 싶은 책을 전자책 리더기에 담아 갔었는데, 정작 카페가 문을 닫을 때까지 이 책자에 푹 파묻혀서 읽었다. 차를 좋아하지만 큰 관심은 없었던 나를 사로잡은 것은 바로 첫 페이지, 창업주의 편지였다.
창업주인 Taha Bouqdib 는 모로코와 프랑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다양한 차를 접하면서 자랐다. 성인이 되어서도 차 업계에서 일하면서 차 숲과 정원, 차를 생산하는 나라들을 여행했고, 단순히 애호가를 넘어 차를 향한 뿌리 깊은 열정을 발전시켜나가게 된다. 최고의 차를 만들기 위해 침실을 연구실로 바꾸기도 하고, 미각을 단련시키며 약 15년 동안 스스로를 훈련시키는 여정에 이른다. 그렇게 유년시절부터 자신이 쌓아온 차에 대한 연구와 진수를 아시아에 알리겠다는 일념으로 싱가포르에 왔고, 지금의 전 세계적인 차 브랜드인 TWG로 성장시킨다.
Taha의 편지를 읽으면서, 차에 대한 애정과 진심이 느껴졌다. 브랜드를 보고 감동받은 적, 철학과 창립 이야기에 매료된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차(茶)라는 한 길만 판 외골수적인 면모에서 낭만이 느껴졌다. 이야기는 소비자의 마음을 매혹시키고, 소비자를 감동시키는 브랜드는 팬을 만들어 낸다.
TWG에서 제조하는 차들은 T0000 과 같은 코드별로 분류되어 있다. 아침/오후/저녁 등 시간에 따라 알맞은 차나, 일본, 한국, 하와이, 뉴질랜드 등 원산지별로도 메뉴를 나누어 놓았다. 브랜드 로고에 1837년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종종 이 브랜드에 1837년에 만들어졌다고 오해하곤 한다. 실제로는 2008년 8월에 설립되었고, 1837년도는 싱가포르가 차가 교역되기 시작한 년도이다. 책자에는 차 원산지에 대한 짧은 소개 글도 들어있다. 각 나라별 차의 특성뿐만 아니라 재배지 별로 다른 차의 맛도 소개되어 있어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TWG는 섬세하고 정성스럽게 차를 내린다. 정제수를 사용해야 하며, 끓는 물은 100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 처음부터 마지막 모금까지 일관된 맛을 즐길 수 있도록, 티백은 꼭 꺼내야 한다.
#감각적인 티타임
주문한 실버문 티와 스콘이 나왔다. 보통 빵과 차를 마시면 속이 더부룩해져서 후회하곤 하는데, 속이 편하고 감각적으로 즐거운 식사였다. 스콘의 고소하고 따뜻한 버터향이 훅 다가왔다. 오븐에 빵을 구울 때 부엌에 퍼지는 그런 부드럽고 달콤한, 걱정이 사라지는 냄새랄까. 단단했지만 건조하지 않았고, 건포도가 촘촘히 박혀있었지만 달지 않았다. 푸딩처럼 탱글한 젤리와 하얀 생크림이 뭉툭한 나이프와 함께 나왔다. 게이샤라는 이름의 젤리는 귤 향도 얼핏 느껴지는 복숭아 맛 티 젤리였다.
호텔 로비의 카페처럼 고급스러운 공간에서 천천히 퍼지는 오페라를 들으면서 천천히 스콘을 씹었다. 월급을 벌지 않아도 되는, 9시에 출근할 필요가 없는 부잣집 딸이 된 기분이었다. 실버문은 녹차를 베이스로 한 차였는데 처음에는 녹차의 씁쓸한 맛이, 잠시 뒤에는 딸기와 바닐라 등 과일향이 남아 입안이 개운해졌다. 아직 온기가 느껴지는 스콘을 둥글게 잡고 살짝 부숴서 먹었다. 버터 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역시 스콘은 두 손으로 잡고 먹어야 제 맛이다. 금속 주전자랑 쟁반에 비친 내 모습이 어색했다. 어린 시절 장난감 찻 주전자로 하던 놀이가 떠올라 피식 웃었다.
#차를 마시는 것은 나를 귀하게 여기는 행위이다.
약 3년 전, 설립 초기의 스타트업에서 잠시 일한 적이 있다. 미국인 지사장과 단 둘이 일했었는데, 완벽하지 않은 영어로 사장의 비서 역할을 하며 미팅을 따라다녔다. 입사 3일 만에 중요한 회의에서 기술 동시통역을 했으며, 시장 조사, 사업 자금 마련을 위한 정부 프로그램 지원도 맡았다. 업무 경력이 1년도 채 되지 않은 나는 내게 주어진 업무뿐만 아니라 한국어가 완벽하지 않은 사장의 귀와 입이 되어 은행부터 공공기관과의 소통 등을 도와야 했다. 그는 일이 잘 안 돌아가면 내가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부족한 탓이라며 힐난했고, 일을 가르쳐주지 않았으며 시간도 잘 내주지 않았다. 한 번은 통화로 F가 들어가는 욕을 받아내다가 고개를 파묻고 운 적도 있었다. 지사장은 185cm의 키가 넘고 네모난 얼굴에 강한 인상과 다부진 체격을 가진 40대 남자였다. 멀리서 묵직한 존재감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면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사무실에 출근하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이 일을 어떻게 해낼지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람이 무섭다.’였다. 얼음판을 걷듯 긴장하며 지냈던 내게 큰 위안이 된 이야기가 하나 있다. 다음은 불교 승려인 아잔 브라흐만이 쓴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라는 에세이에 나오는 이야기다. 아잔 브라흐만이 교사로 재직할 때, 한 동료가 들려준 경험담이라고 한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얀마의 정글지대에서 영국군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그는 나이가 어렸고, 고향에서 멀리 떠나와 있었으며, 몹시 겁에 질려 있아ᅠ갔다. 몇 명 안 되는 소대원들과 함께 있었는데, 어마어마한 숫자의 일본군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소대장이 대원들에게 전투 준비를 명령하리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소대장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대원들에게 자리에 앉아 따뜻한 차를 끓일 것을 명령한다. 죽기 일보 직전에서 차를 마실 생각을 하다니. 어린 병사는 지휘관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군대에서는, 특히 전시 상황에서는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한다. 대원들은 각자 생애 마지막이 될 차 한잔을 끓였다. 그들이 차를 다 마시기도 전에 정찰병이 다시 돌아와 소대장에게 귓속말로 무엇인가를 속삭였다. 소대장은 대원들에게 다음의 소식을 전한다.
“적군이 이동을 했다. 이제 퇴각로가 열렸다. 신속하고 소리 없이 장비를 챙겨라. 자, 출발!"
그들 모두는 무사히 그곳을 빠져나왔으며, 그 결과 여러 해 뒤에 그는 내게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줄 수 있었다.
그날부터 나는 계속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아주 따뜻한 물을 붓고 호호 불어가면서 천천히 마셨다. 몸을 작게 말고 준비하는 마음으로. 지금 내 입 안에 머물러 있는 한 모금에만 집중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삶이 그 소대장의 지혜에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다. 단지 미얀마의 전쟁터에서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수없이 그 덕을 보았다는 것이다.
삶에서 그는 여러 차례 숫자적으로 압도적인 적군에 포위된 적이 있었다. 그가 말하는 ‘적군’이란 심각한 질병, 절망적인 시련, 비극적인 사건이었으며, 그 상황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전혀 탈출할 구멍이 없어 보였다. 미얀마에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그는 문제와 맞서 싸우려고 노력했을 것이고, 의심할 여지없이 상황은 더 악화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대신 죽음이나 치명적인 어려움이 사방에서 그를 에워쌌을 때 그는 단순히 자리에 앉아 차 한 잔을 끓였다.
세상은 매 순간 변화하고 있다. 삶은 하나의 흐름이다. 그는 차를 마시며 자신의 힘을 축적했고, 포위망을 뚫듯이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적당한 시기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시기는 언제나 찾아왔다.
차를 즐겨 마시지 않는 사람이라면 다음의 말을 기억하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
너무도 당연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이것이 당신의 삶을 위험에서 구원해 줄지도 모른다.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P.148-150>
보통 월요일 저녁에는 아 일주일은 어떻게 버티지. 4일이나 더 일을 해야 하나, 라는 생각에 쉽게 우울에 빠진다. 신기하게도 티룸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회사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차가 향긋하고 특별했지만, 무엇보다 덕후의 열정, 좋아하는 것에 대한 순정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롭고 새로웠다. 그 마음이 내게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사치스러운 관광명소라고 생각했던 twg 티룸에서 보낸 월요일은 나를 돌보고 사랑해주는 시간이 되었다. 조금 뜨거운 차를 호호 불면서 생각했다. 차를 자주 마셔야겠다고. 천천히 조금씩 오랜 시간을 들여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