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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Dec 30. 2020

<넷플릭스 리뷰> 이번 생은 처음이라

거리두기에 지쳤다고요? 여기서 달달함 충족하고 가세요 ♡  

귀국 후 2주 간 자가격리를 하면서, 적적하고 심심하며 좀 외로웠다. 당시 만나고 있었던 L은 귀국 이후로 연락이 뜸해지더니, 며칠씩 답장을 안 하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이 관계는 쫑났구나. 


그토록 그리워했던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폐 속 깊숙이 닿는 차가운 공기가 서울에 왔음을 실감하게 했다. 택시의 창 밖으로 펼쳐지는 서울은 낯선 외국의 도시 못지않게 나를 설레게 했다. 이제 자가격리만 끝나면 아껴두었던 휴가를 쓸 수 있다.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한 해의 마무리였다. 그런데 매일 밤 자꾸 그 친구 생각이 났다. 내가 장기간 한국에 머물러야 하는 상황에서, L과는 이미 끝이 뻔한 관계였다. 짐을 싸서 서울로 날아오면서, 공항에서 마스크가 젖도록 울었다. 좀 구질구질하긴 해도 실컷 울면 금방 잊을 수 있을 거야. 자정에 이륙한 인천발 비행기에서 생각했다. 내일 아침 일어나면 난 인천에 도착하겠지. 너와의 기억들은 싱가포르에 놓아두고 씩씩하게 서울에서 새롭게 시작할 거야. 


그것은 단단한 착각이었다. 생각보다 마음이 깊었던 것이다.  왓츠앱 메신저로라도 질척대고 싶었다. 모두가 잠든 자정이면 우리 집 옥상에서 그 애와 밤하늘을 보았던 밤을 생각했다. 주유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싱가포르가 내려다 보이는 산 위의 공원에서 야경을 보던 밤도. 자가격리를 하면서 나는 매일 L 과의 짧은 만남들을 돌려 감고 있었다. 넓은 숙소를 독차지하는 행복함도 잠시, 곧 텅 빈 것처럼 느껴졌고 혼자 모기와 바퀴벌레를 잡는 것도 외로웠다. 숙소비로 큰돈을 지불했으니 맛있는 음식을 시켜 먹기도 죄책감이 들었다. 자가격리의 단점은 한 눈 팔 데가 없다는 것이다. 친구를 만나서 소주를 기울일 수도 없고, 한강을 달리거나 산책을 할 수도 없으니 생각을 전환하기가 참 어려웠다. 내게 허락된 외출은 문 앞 두 발 자국뿐이었다. 택배가 올 때. 


그래서 넷플릭스를 켰다.

  

나는 영상물을 볼 때, 공포나 스릴러처럼 자극적인 콘텐츠보다는 빵빵 터지는 드라마를 좋아한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지친 마음을 달래며, 생각을 비우고 웃고 싶기 때문이다. 팍팍한 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수사/범죄물보다는 <모던 패밀리>처럼 사랑스러운 시트콤을 좋아한다. 우울함에 허우적대는 나를 끌어올려 줄 드라마 없나? 꼼짝없이 숙소에 갇힌 난 설렘이 절실했다. 그것이 남의 연애일지라도. 그렇게 마주한 드라마가 '이번 생은 처음이라' 다. 달달하고, 유쾌하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데가 있다. 세 여주인공들의 사랑과 우정, 성장이 종합 선물 세트처럼 빠짐없이 담겨있는 작품 되시겠다. 


기쁠때나 슬플때나 함께하는 세 친구들


#결혼인데 결혼이 아닌 - 혹시 시간이 좀 되시면 저랑 결혼하시겠습니까? 


S대를 나온 우등생인 지호는 보조작가다. 작가 데뷔의 꿈이 무산되면서 지호는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지만, 그렇게 열심히 일했음에도 자신의 몸을 놓일 방 하나 없는 현실에 좌절한다. 그때 하우스 푸어이자 비혼 주의자인 세희를 만나게 되고, 월세도 필요했고 결혼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세희는 결혼을 제안한다.  로맨스는 쏙 빠진 이상한 결혼 계약은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게 된다.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 
네.
혹시 시간이 좀 되시면 저랑 결혼하시겠습니까. 

그때 나는 어디라도 잠깐 주저앉고 싶었다.
그게 맨홀이든 구덩이든 어디든 간에. 
오늘 밤은 좀 편하게 자고 싶다.


#관전 포인트 3가지

(1) 지호의 성장 - 남편을 짝사랑하는 건 처음이라


서로 사랑하지 않기로 약속한 결혼 관계였지만, 뜻하지 않게 남편에 대한 짝사랑이 시작되면서 관계의 시소가 지호에게 기울어진다. 세 여자 주인공 중 가장 똑똑했던 지호는 1등과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던 똑순이다. 어찌 보면 그 좋은 학벌을 두고 보조작가로 살면서 자기 것을 못 챙기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가 되어서 결국 꿈에 가까워진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자라 늘 참기만 하던 지호는 겉으로만 보면 순둥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성폭행 미수를 저지른 동료와 화해하라는 감독과 작가의 압박(이자 개소리는) 단호히 거부하고, 꿈이 자신을 해치자 스스로를 먼저 지키고 꿈을 내려놓는다. 카페 알바부터 시작할 줄 알고, 낯선 사람에게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는 룸메이트도 될 정도로 똑 부러지다. 서른이 되도록 모쏠이라는 것에 좌절하지만, 낯선 사람에게 충동적으로 첫 키스를 하는 귀여운 또라이기도 하다. 세희의 비밀을 알고서도, 상처 받을 수 있다는 걸 감수하고도 세희를 좋아하기로 마음 먹는 장면에서는 단단한 용기가 느껴진다. 지호는 자신의 안전지대(comfort zone)를 넘어설 줄 아는 멋진 여자다.


지호의 숨겨진 매력은 순발력이다. 갑작스러운 결혼에 대한 시아버지의 추궁을 손가락 하트로 가뿐히 넘겨버린다


(2) 눌려있던 쎈캐, 수지의 반격

큰 키로 웬만한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지는 능력 있고 시원시원한 커리어우먼이다. 본인에게 성희롱을 일삼는 동료가 있지만, 수직적인 분위기에서 늘 피해를 보는 건 여자라는 걸 경험해왔기에 오늘도 분을 삭일뿐이다. 그런 수지는 마 대표를 만나면서, 자신을 모욕했던 동료에게 강펀치를 날리고 '사장님'라는 어릴 적 꿈을 향해 걸어간다. 더불어 깊은 관계를 맺지 않고 상처도 받지 않으려고 했던 수지가 사랑을 퍼부어주는 마 대표에게 점점 마음을 여는 것도 사랑스러운 관전 포인트다. 주인공의 로맨스가 답답해져 갈 때, 서브 커플로 눈을 돌리는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3) 애틋하고 귀여운 로봇 세희

'좌 대출 우 고양이'가 별명일 정도로 대출을 갚는 것과 고양이밖에 모르는 세희. 답답하기 짝이 없지만, 세희의 매력은 감언이설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표정이 없다시피 하고 표현도 서툴어 로봇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지만, 알고 보면 지호를 아끼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지호의 단단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랑에 마음을 닫음으로써 스스로를 벌주지만, 지호를 만나서 서툴게 마음을 여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세희: 저도 아직 지호 씨를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글을 쓰겠다 결심했을 때도
그만두겠다 결심했을 때도, 그리고 결혼도.  
스스로를 위해서 선택하신 걸 겁니다.
약하고 수줍어 보여도 단단한 사람이니까요.

내진 설계가 잘 된 분입니다.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은 하지 않으시는.
그러니까 지호 씨는 언제라도 자기가 행복한 길을 스스로 선택하실 겁니다.
그리고 저는 결혼 생활 동안 그 선택에 폐가 되지 않겠습니다.

제가 약속드릴 수 있는 건 이게 답니다. 죄송합니다.
행복하게 해 주겠다. 지켜주겠다. 그런 말이 아니어서.
제가 드릴 수 있는 약속이 이거뿐이라서.

<결혼식 장에서 지호의 엄마에게 건네는 세희의 대사>


#이 집 대사 참 잘하네 

7년의 연애 끝에 결혼을 앞두고 마음이 다른 커플, 하우스 셰어를 위해 결혼한 커플, 그리고 깊은 연애를 하지 않는 여자와 그런 여자에게 구애하는 남자 등 가지각색의 연애를 보는 쏠쏠한 재미가 있다. 조금 더 여자 주인공들에게 조명을 비추는 데, 그들이 성장 환경에서의 상처를 극복하고 자신을 구속하는 안전지대 밖으로 벗어나는 것을 응원하게 된다. 무엇보다 매회마다 재생 버튼을 멈추고 받아 적을 정도로 뛰어난 대사가 압권이다.


연말이면 또 한 살을 먹는다는 생각에 울적해지곤 하는데, 그럴 때면 세희의 대사를 다시 곱씹어본다.


<신피질의 재앙>

그 짧은 문장에 서른이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쓰다니 신피질의 재앙이네요.
스무 살, 서른, 그런 시간 개념을 담당하는 부위가 두뇌 바깥 부분의 신피질입니다.
고양이는 인간과 다르게 신피질이 없죠.  

그래서 매일 똑같은 사료를 먹고 매일 똑같은 집에서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내도 우울하거나 지루해하지 않아요. 그 친구한테 시간이라는 건 현재밖에 없는 거니까. 스무 살이니까, 서른이라서, 곧 마흔인데 시간이라는 걸 그렇게 부초로 나눠서 자신을 가두는 종족은 지구 상에 인간밖에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나이라는 약점을 공략해서 돈을 쓰고 감정을 소비하게 만들죠. 그게 인간이 진화의 대가로 얻은 신피질의 재앙이에요.

서른도 마흔도 고양이에겐 똑같은 오늘일 뿐입니다.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로 꿀꿀함 요즘, 달달함을 대리 만족하고 싶다면 <이번 생은 처음이라>를 꼭 추천하고 싶다. 마지막화에서 주인공들의 감정선이 조금 이해가 안 가긴 하지만, 그럼에도 볼 가치가 충분한 드라마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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