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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Aug 10. 2020

노란색 포스트잇을 떼어냈다

그럼에도 No 를 말해야 하는 이유 

가희에게, 


오늘 노란색 포스트잇들을 모두 떼어내 버렸어. 


내 방 책상 위의 벽면에는 손바닥 반절 쯤 되는 포스트잇이 빼곡히 붙어있어. 재택근무를 하는 오전에도, 해가 지고 글을 쓰는 밤에도 책상 위에서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으면, 모니터 오른쪽 상단 벽으로 시선을 뺏기곤 했지. 종이를 채운 말들과 노란 종이가 정신이 사나워서 떼어버리고 싶었던 적도 많아. 나에게는 너무 호전적이고 조금은 악에 받친 것 처럼 느껴지는 글귀들이었거든.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어. 그동안은 그게 꼭 필요했거든. 눈에 띄는 종이들을 보니, 이런 것들이 있네. 

싸우는 것도 경험이다.

내 인생은 이제 시작이고, 난 원하는 것 다 이루면서 살꺼야. 내 인생 이제 시작이야. 내가 원하는 거 다할거야. - 박새로이 <이태원 클라쓰> 中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고 내 인생을 ‘유보' 상태로 두면 안 됩니다. 결정하고 앞으로 나아가세요. 주변에 나를 못마땅 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잘살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 정도 미움은 자유롭게 살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입니다.  - 기시미 이치로 <미움받을 용기>  


5개월 전, 새로운 팀에 막 적응해 나가던 나는 자신감이 정말 바닥을 쳤어. 나보다 10년은 경험이 많고 자신감에 차 있는 선배가 시키는 말은 당연히 맞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시간이 지날 수록 이건 아닌데, 고객에게 혼선을 줄 것 같은데, 지금 우리 팀 상황에서는 할 수 없는데, 의심과 걱정이 스물스물 피어올랐지. 


그럼에도 내 의견을 피력하고, '안 돼 (No)' 라고 말하는 게 너무 무섭더라. 서로 핑퐁을 주고 받는 회의 시간에 들어가면, 꼭 말이 엉켜 버리고, 문장 꼬리쯤에서 말이 피시식 힘을 잃어버렸어. 몇 초간 정적이 흐르다가 어김없이 이 말이 흘러나왔지.


'네 말을 이해 못했어. 다시 말해 줄래?'   머릿 속에 엉킨 것들을 풀어내고 설명해내기에는 내 영어가 부족했고, 기본적인 의사소통도 못하는 나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져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버리곤 했어. 내 실력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땐, 다른 사람을 믿는 게 더 쉽거든. 나는 내게 주어진 일을 하면서도, 나와 일하는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기쁘게 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어.


연고가 없는 타지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자신감도 바닥이었고, 내가 팀에 도움 되는 사람이 아닐까봐 늘 신경을 쓰고 있었거든. 집을 떠나 왔는데, 이 나라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나는 사회생활에서 실패한거라고. 스스로를 코너에 몰아 버렸어. 


선배가 가르쳐주고 챙겨주는 한국 회사와 달리, 글로벌 회사는 각자 도생하는 분위기였고, 늘 커뮤니케이션과 설득의 연속이야.야망 넘치고 목소리 큰 사람들 사이에서 소심한 나는 살금 살금, 살얼음 판을 걷는 기분이었지. 동료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했어. 배려심이 나의 장점이니까. 그런데 시간이 갈 수록 뭔가 어긋나더라. 내가 힘들다는 것을 동료들은 몰랐고, 더 많은 일들을 들이 밀었어. 일과 시간에 자꾸 멍해지는 시간이 늘었고 무서운 꿈을 꾸기 시작했어.


집에 가는 길에 눈물이 멈추지 않던 어느 날, 뭔가가 고장났다는 걸 알아차렸어. 나를 살려내야 해. 마음 속에서 곧 꺼져갈 것만 같은 목소리를 들었어. 그래서 노란색 메모지들을 붙였어. 스스로에게 각인시킬 수 있도록 눈에 잘 띄는 벽면에 말이야. 내 눈 속에, 몸 어느 한 구석에 주입시키지 않고서는 난 절대 그렇게 될 수 없을 것 같았거든. 


내가 먼저 나를 믿고 있다고 말해주지 않는다면, 계속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먼저 들을 것 같았어. 회의 시간이면 No 라고 할 자신이 없어서, 쥐죽은 듯 있고 싶었거든. 싸우고 싶지 않아서 무리한 요구에 Yes 를 할 찰나, 그 메모지를 보면 내 마음속 내가 믿는 말들을 꺼낼 수 있었어. 문법이 조금 틀려도, 목소리가 떨려도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었어. 


요구하는 일들을 거절하는 내가 실망스럽고, 무능력 해보일 때도 많았어. 그러나 모든 사람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나는 좋은 동료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나 자신이 나를 먼저 등져버릴 것 같더라.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사는 것을 두려하고 그들의 감정을 헤아리느라, 내 마음을 등져버린다면, 나 자신의 신뢰를 잃게 되고, 그러면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었어.


무엇보다도 회사라는 필드는, 내가 그 위에서 플레이어가 되어 싸우고, 내 목표를 달성하고 회사에서 번 돈과 안정성으로 6시 이후의 삶을 지켜야하는 곳이지, 사람들을 사랑하는 곳이 아니라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어. 그 필드 위에서 내가 나를 믿어주지 않는다면, 내가 하는 일은 내가 제일 잘 알텐데 내 노력과 시간을 믿어주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믿어줄까. 무슨 힘으로 경기의 무게를 버틸 수 있을까. 


지난 주말, 아무리 해도 계속 주어지는 일들과 회사의 기대에, 감정적으로 바닥을 쳐버렸다고 했지. 그 혼란스러움과 지쳐있음이 메시지만으로도 전해졌어. 회사가 너를 닳지 않게 하도록, 너를 잃지 않게 하도록, 너를 지켜야겠다고 다짐하던 너. 5개월 전의 내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계속 너에게 쓰였어. 


지금 네가 얼마나 외로울지, 힘들지, 버거울지, 답답할지 너무 잘 알 것 같거든. 그냥 내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어. 우리가 하는 일도, 회사의 성격도 다르지만 너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곧 이런 말들이, 더는 필요 없어지는 날이 오길 기도해. 메모지를 떼고 나서도, No 를 말하는 건 늘 어려워. 그럼에도 위안이 되는 사실은 상대가 인정하고 수긍하는 경우도 많다는 사실이었어. 거절 뒤에는 무시무시한 반박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리 무섭지 않은 곳이더라. 내가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으 절대 모른 다는 것. 그리고 내 말이 힘이 실릴 수 있도록, 나를 단단히 믿어야 한다는 것. 그 말을 꼭 해주고 싶었어. 너를 지키는 말들이, 너에 대한 믿음이 너를 갑옷처럼 감싸길 바라. 거절 할 수 있는 자유가 방패처럼 너를 자유롭게 하길. 나의 이야기가 너의 상황에 도움이 안될지라도 나는 늘 너를 응원하고, 너는 더 나은 날들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걸 말해줄 수 있어. 나는 여기에 있어. 


 -6월의 어느 토요일 밤에, K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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