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고 싶은 욕심이 불어날 때 - '그냥'이 필요한 순간
'완벽주의'라는 말의 함정이 뭔지 알아? 완벽주의자라고 하면, 미켈란 젤로 같은 천재가 고집스럽게 장인정신으로 뭔가를 빚어가는 게 연상 되지. 그런데 사실 완벽주의자가 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가능성이 더 많아. 이상향이 너무 높고 완벽하기에, 미숙하고 불완전한 과정을 버틸 수가 없거든. 처음부터 완벽한 결과물을 얻을 생각을 하면 담금질하는 지루한 과정을 견딜 수가 없잖아. 하다 못해 고객에게 보내는 짧은 메일 한 통을 쓰는 것만 해도 그래. '이거 사 주세요' 라고 말하는 대신에 팔지 않는 척, 세련되고 아름답고 친근하게 돌려서 말하는 게 참 어려워. 사람들은 세일즈에 대한 기본적인 거부감이 있으니까. 목적이 분명한 내용이지만, 조금이라도 예뻐보이게 고치고 또 고치거든. 글쓰기는 오죽하겠어? 아무리 거지 같아도 'v 1.0' 부터 '최종' '진짜 최종'을 거듭 하며 계속 고쳐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엇이든 빨리 써서 내보내고 계속 고치는 것. 그게 정답 인 것 같네.
나의 20대 초반에 뿌리내리고 있었던 정서는 열등감과 불안이였어. 감사하게도 학위를 받을 즈음엔 그 단계를 졸업 해 있더라고. 물론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지라 지금도 매일 비교는 하지. 서울의 내 친구가 점심에 먹은 브런치 사진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세상이니 말이야 . 오늘은 주 중에 밀린 글쓰기 과제로 끙끙 대다가 평소 팔로우 하던 작가들의 글을 찾았어. 뭔가 글이 너무 뻔한 것 같았거든. 재미도 없고. 매일 글쓰기 수업을 시작한 이후로 대학교 때 과제 하던 것 마냥 소장한 책들을 뒤적이게 되더라. 글을 어떻게 하면 재밌게 쓸지 고민 하다보니, 완성된 글을 읽음으로써 배우는 게 많더라고. 진실을 고백하자면, 그들의 감동적이고 완벽한 결과물들을 보면 내 글이 초라해져서내 글을 엎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더 컸어.
돌이켜보면, 열등감을 졸업 할 수 있었던 계기는 성취 경험 이었던 것 같아. 나는 영어를 잘해. 글로벌 회사에서 APAC 시장 고객에게 영업을 하고,미팅을 조율하고, 동료들과 토론을 하지. 원어민 처럼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걸로 밥벌이를 하고 있으니, 생존 스킬이라고 할 수 있어. 사실 미국에서 산 건 9개월이 전부 였고, 원래는 영어를 전혀 못하던 토종 한국인 이었어. 하지만 나는 글로벌에서 일하고 싶었으니까 신입생때부터 꾸준히 공부를 했어. 영어는 콘텐츠가 방대하니 한국에서 독학 하면서도 상당 수준까지도 올라갈 수 있거든. 같은 영화를 100번씩 보고 앵무새처럼 여자 배우의 대사를 따라한 적도 있고. 그렇게 3년을 공부하고 미국에서 생활을 하니까, 영어가 유창해졌어. 몇 년동안 꾸준히 노력하던 게 결실을 본거야. 커리어를 쌓고 해외 취업을 할 수 있었던 밑천이 되기도 했고.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니까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생기더라. 어쨌든 그때 발굴한 노하우로, 대학생 때 중학생 부터 대학생, 직장인들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용돈 벌이를 했어. 사람들 앞에서 강연을 하기도 했고. 그런데 다들 자꾸 묻는 거야.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잘할 수 있냐고. OO 는 언어적으로 타고 났나보다. 나는 그렇게 못할 것 같아' 하면서.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인내심과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해. 학습자 본인 뿐만 아니라 선생님의 인내심도. 언어 학습에 있어 선생님은 곧 학습자가 상호작용하는 모든 사람이야. 막 한글을 떼면서 '왜'로 시작하는 수많은 질문들로 엄마를 괴롭혔던 것 기억해? 완벽주의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있어서는, 외국어 만큼 좋은 예시가 없어. 단어라도 내 뱉어야, 말이 늘어. 내가 미국에 처음왔을 때, 수줍고 느린 영어를 인내심있게 들어준 친구들이 있었지.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줄래?' 를 수 없이 들었던 날들이 많았어. 사실 지금도 가끔 그래. 외국인의 숙명이겠지. 그때마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벌게져서는 쥐꼬리만한 자신감을 턱 끝까지 끌어올려서 또박 또박 말했던 내가 기억이 나.
다이어트에 정답은 없어도 정석은 있지. 식이조절 80%와 운동 20%의 공식.영어의 정석은 그저 계속 듣고, 외우고, 말하는 것. 사실 글쓰기의 정석도 답이 나와있는 거 아닐까. 좋은 책을 읽고, 문장을 수집하고, 매일 쓰고, 고치는 것. 그리고 감사하게도 내 글을 읽어주는 분들의 참을성을 조금 빌리는 것. 4시간 동안 오늘의 글과 씨름하고, 중간 중간 유투브와 블로그에 정신을 뺏기다가 도달한 결론이야. 이 글을 쓰고 '확인'을 누르면, 오늘의 완벽주의와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할래. 기특하다. 그런 의미에서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나 한 편 보고 자야 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