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날이 여름
제트기 굉음이 사방을 찢어놓았다. 어떻게든 무시하고 자보려 했으나, 잠은 오래전에 달아나 버렸다. 밤새 뒤척이던 짝꿍도 괴로운 듯 온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는 제트기 소리 때문에 꿈자리까지 뒤숭숭했다면서 내가 이 집에서 계속 살아도 괜찮을지 염려했다. 놀러 와서 집 보느라 정작 제대로 쉬지도 못한 그 앞에서 투덜대기는 미안해서 얼버무리고 말았는데, 꼭 이럴 때만 눈치 빠른 그는 신경 쓰지 말고 방 빼도 된다고 덧붙였다. 마지막 날까지 걱정만 시키는 것 같아서 아침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공항 가기 전에 근사한 브런치 집이라도 데려가려고 했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어쩔 수 없이 그가 떠날 채비를 하는 동안, 짝꿍이 먹고 싶다던 그릴 샌드위치와 체리 토마토가 올라간 부르스게타를 사 왔다. 졸려서 뾰로통해진 얼굴로 한입 베어 문 짝꿍의 입에서 으음, 하는 나지막한 소리가 나왔다. 맛있는 밥이라도 먹여서 보내고 싶었던 터라 안도의 한숨이 낮게 새어 나왔다. 포장해 오느라 치즈가 굳으면 어쩌나 얼마나 걱정했는지⋯. 나는 그제야 사워도우를 직접 만든다더라, 주말에는 통기타 공연도 한다더라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냉장고를 열었다. ‘다음에 오면 꼭 같이 가봐야지.’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짝꿍이 좋아하는 수박을 챙겼다.
비행기 놓칠까 봐 발을 동동 굴러놓고는 막상 공항 도착해서 수속까지 마치고 나니 모든 게 너무 빠른 것만 같았다. 짝꿍이 돌아간다는 실감이 파고들자 우리는 조금 착잡한 얼굴이 되어 손을 꽉 잡았다. 출국심사대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챙겨왔던 수박을 꺼냈다. 맛있는 거 뭐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었지만, 내게 남은 건 이 빨간 수박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달고 맛있는 수박이어야 할 텐데⋯.
“배불러서 못 먹겠어.”
금방 전에 먹은 샌드위치 때문인지, 짝꿍은 몇 입 먹다가 금세 기권했다. 그나마 먹은 것도 가져온 성의를 봐서 먹어준 게 분명했다.
“남은 건 버리자, 너 어차피 안 먹잖아.” 그가 말한 것처럼 수박을 먹을 것도 아닌데, 어쩐지 쉽게 버릴 수가 없었다. 공항 오는 길 내내 손목에 걸고 있던 것처럼, 먹다 만 수박이 담긴 봉지를 손목에 다시 걸었다.
탑승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와서 출국심사대 앞에 줄을 섰다. 사람이 제법 많아서 다시 가벼운 불안이 올라왔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을 수 있는 긴 줄이 좋기도 했다. 마침내 그의 차례가 되어 여권을 꺼내자 나는 줄 맨 뒤로 도망가고 싶어졌다. 우리 처음부터 줄 다시 서자, 아니, 지금부터 휴가 다시 시작하면 안 돼? 말도 안 되는 떼를 쓰고 싶었다. 치앙마이에서 지낼 준비하는 데 온 정신이 팔려서 잘해주지 못한 게 끝끝내 마음에 걸려 시간을 돌리고만 싶었다.
입안에 못다 한 말들이 차오르는 사이, 출입국심사관은 그의 여권과 비행기표를 확인하고는 얼른 지나가라고 손짓했다. 그의 눈이 언뜻 촉촉해졌다. 오랜 시간 나를 지켜봐 준 눈이었다. 이내 장난기 가득한 평소 모습으로 돌아온 그는 내 머리에 커다란 손을 턱하고 올려 두어 번 흔들고는 씩씩하게 걸어갔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울면 내가 엉엉 울어버리고야 말 것임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자 나와 그 사이에는 투명한 벽이 생겼다. 그를 볼 수는 있어도, 조금 전처럼 만지거나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오직 보는 것만이 가능해서 나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를 눈으로 좇았다. 인파에 섞여 몸은 안 보여도 그의 초록 모자만큼은 잘 보였다. 다행이었다.
물결처럼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초록 모자가 이리저리 떠다녔다. 아, 저기쯤 갔구나. 아직은 많이 기다려야겠다. 나는 내가 저 줄에 서 있던 때를 떠올리며 그가 어디쯤에서 뭘 할지 더듬더듬 그려봤다. 이제 신발도 벗고 노트북도 슬슬 꺼내야지, 바지 주머니에 든 것도 잊지 않고 꺼내고. 벌써 들어갈 차례네. 마지막으로 게이트를 통과하기 전, 초록 모자가 고개를 돌렸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더니 공중에 긴 팔이 휘적휘적 흔들렸다. 안녕. 응, 안녕.
이럴 때는 도대체 어떻게 1년이나 떨어져 지낼 생각을 한 건지 나조차 신기하다. 혼자 지내는 생활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기에 더더욱 그렇다. 예전에는 무조건 짝꿍과 딱 달라붙어 있고 싶었다. 조금은 애처로웠던 그 습성은 부모가 내게 남겨준 유산이었다. 하루가 멀다고 어딘가로 사라지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성장한 결과, 사랑하는 이의 부재는 그 자체로 엄청난 고통이 되었다. 어렸을 때 그런 식의 갑작스러운 헤어짐은 몇 번을 반복해도 늘 세상의 종말처럼 느껴졌다. 그 끝에 혼자이면서도 혼자임을 견딜 수 없는 내가 남겨져 있었다.
그러니 어느 날 그에게 혼자 덕유산도 보고, 바다 건너 다른 땅도 다녀오라고 했을 때, 가장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눈앞의 풍경에 들뜬 그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올 때, 내가 느꼈던 기쁨을 가장 낯설어한 사람도 나였다. 그의 벅찬 얼굴을 목격하는 것만으로 그토록 행복할 줄은 정말로 몰랐다. 그렇게 그가 바깥세상을 모험하는 동안, 나도 우리 집에서 모험을 했다. 그를 보낼 수 있게 된 것도, 그의 행복을 나의 행복으로 삼는 것도 결국 모두 나를 해방하는 일이었음을 깨달은 건 나중이었다.
8살의 내가 이렇게나 달라진 나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아이를 꼭 안고서는 아주 두려운 모험마저 기꺼이 함께할 수 있는 이를 만나게 될 거라고 알려주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사랑이 너를 기다린다고, 그러니 다 괜찮아질 거라고, 정말 다 괜찮아진다고 말해줄 수만 있다면.
초록 모자가 눈에서 사라진 지 얼마간 지나고 나서 그에게서 곧 이륙한다는 전화가 왔다. 집에 갈 시간이었다. 오토바이 택시를 불러놓고 공항 의자에 앉아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반가움과 기쁨과 설렘, 슬픔과 쓸쓸함과 그리움으로 범벅이 된 얼굴들. 나는 그들 사이에서 내가 보이는 것만 같아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괜찮다, 괜찮다. 몇 달 후면 나도 저들처럼 입국 게이트 앞에서 그를 기다릴 것이다. 그가 게이트를 통과하면 나는 눈이 안 보일 정도로 활짝 웃겠지. 그러면 그는 투박하게 나를 끌어당겨 안아 주고는 얼른 가자, 할 것이다.
그와 공항을 나서는 상상에 빠져 있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기다리던 택시였다. 나는 공항을 빠져나가 헬멧을 쓰고 재빨리 오토바이 뒤에 올라탔다. 오토바이가 속도를 올리자, 손목에 걸린 수박 봉지가 펄럭거렸다.
이제 여러분의 메일함으로 여름이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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