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풍경

모든 날이 여름

by 하니Hani

짝꿍이 근교로 드라이브가자며 항동에 있는 한 카페에 데려간 적이 있다. 그 카페 앞에는 계단식 논처럼 층마다 너른 잔디밭과 작은 연못이 있었다. 연못 위로 길게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가 조용히 흔들리고, 고개를 돌리면 열을 맞춰 서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보였다. 나무 그늘에서는 이름 모를 뮤지션이 통기타를 치며 밥 딜런을 불렀다. 기타 선율에 맞춰 몸을 흔들거리며 건기의 보송한 바람을 맞고 있으니 어느새 더위가 가셨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그저 좋은 오후였다. 그날과 꼭 닮은 하루를 갖고 싶었다.


문제는 그 카페가 치앙마이 시내에서 5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는 점이었다. 카페가 위치한 항동까지 가려면 우선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121번 국도를 타야 한다. 중간에 작은 마을로 잠깐 빠졌다가 곧바로 산으로 들어간다. 거기서부터 경사가 꽤 높은 커브 길을 계속 돌며 고개를 넘어야 도착할 수 있다. 산길은커녕 국도 한 번 타본 적 없는데⋯. 운전한 지 한 달 반쯤 되니 왠지 갈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가다가 사고라도 난다면? 오토바이 운전학원에서 넘어졌던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해보지 않으면 언제나 두려울 거라는 사실도 분명했다. 한번은 넘어야 하는 산이었다. 결국 나는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익숙한 산티탐과 올드타운을 지나는 동안, 부지런히 용기를 그러모았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가는 내내 주문을 외웠다. 어느새 시내 끝자락이었다. 치앙마이 대학교 후문 쪽으로 방향을 틀자, 121번 국도가 눈에 들어왔다. 다들 어찌나 빨리 다니는지 차가 지나갈 때마다 쌩쌩 소리가 들렸다. 수많은 차를 보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머리부터 발까지 차츰 돌로 변해가는 것 같았다. ‘어깨에 힘 들어가면 너도 모르게 엑셀을 세게 잡아당기게 되니까 힘 풀어’, 마지막으로 학원을 나서는 내게 선생님이 해줬던 말이 떠올라 연거푸 어깨를 돌렸다.

왼쪽 깜빡이를 켜고, 다른 차가 오는지 살폈다. 차들은 꽤 멀리서 달려오고 있었다. 지금이었다. 같이 서 있던 오토바이들에서 엑셀을 당기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윙윙거리는 벌 떼에게 둘러싸인 것 같았다. 나도 침착하게 엑셀을 당겨 121번 국도에 올라탔다.


121번 국도는 작은 천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2차선씩 나뉘어 있는, 총 왕복 4차선 도로였다. 오른쪽 추월 차선을 달리는 차를 볼 때마다 정신이 아찔해졌다. 큰 차들이 지나갈 때면 시커먼 먼지구름이 붕 하고 떠올랐다가 내려앉았다. 코와 목이 따끔거렸다.

시내보다 빠르게 다니는 차들에 맞춰 나도 속도를 천천히 올렸다. 40, 45, 55, 60, 70. 자동차 안에서 느끼는 70킬로와 오토바이 위에서 느끼는 70킬로는 무지하게 달랐다. 속도가 올라갈수록 몸을 때리는 바람이 거세졌다.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목을 가누기 위해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갔다. 헬멧 끈이 귓가를 사정없이 때리고, 입고 있는 바람막이는 날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펄럭거렸다. 운전대에서 손을 놓으면 내 몸도 바람에 떠올라 날아갈 것 같았다.

겁이 나면서도 이상하게 심장이 부풀어 올랐다. 내가 달리고 있다니, 121번 국도를 달리고 있다니! 온 신경이 곤두설 정도로 무서운데도, 낯선 흥분과 짜릿함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산꼭대기에서 윙슈트만 입고 뛰어내리는 사람들이 이해될 것도 같았다.


그렇게 20여 분을 달린 끝에 드디어 산길 입구에 다다랐다. 산속에 난 길로 접어들어 우거진 나무가 해를 가리자, 차가워진 공기가 피부를 덮쳤다. 갑자기 시간이 한참 지나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도로를 가득 채웠던 차들은 전부 사라지고, 숲과 나만 남은 기분이었다.


좁고 구부러진 산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앞에서 다른 차가 오는지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급한 커브들이었다. 저 여기 가고 있어요, 하는 경적을 울려가며 조심조심 운전대를 움직였다. 조용한 산속에 경적이 울려 퍼졌다.

커브에 꽤 익숙해졌을 때쯤, 눈에 겨우 들어온 숲길은 고요하고 싱그러웠다. 온통 초록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초록빛이 한데 모여 있었다. 잡초와 들꽃이 뒤섞여 자라고 있는 길 가장자리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비를 머금은 숲의 냄새는 왠지 포근했다. 키가 하도 커서 고개를 뒤로 끝까지 꺾어야만 겨우 그 끝이 보이는 나무들 사이에서 가만히 새소리를 들었다. 살 것 같았다.

이런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다니⋯. 넘어지고, 땅바닥을 구르고, 피멍이 들고, 살이 까지고, 몸져누워가며 배운 것. 창피하고 무섭고 도망치고 싶은 순간을 모두 통과해서 얻어낸 자유. 정말이지 쉽지 않았지만, 운전은 참으로 좋은 것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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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가파른 경사를 오르니 항동, 이라고 새겨 놓은 커다란 표지석이 보였다. 아, 이제 다 왔다! 자꾸만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그 사이, 그전과 같은 자리에 반듯하게 서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들 앞에 도착했다. 땀에 젖은 헬멧을 벗으니 맑게 갠 하늘에 눈이 부셨다. 숨바꼭질하는 어린아이처럼 나뭇잎 사이로 뜨거운 햇살이 얼굴을 숨겼다 비췄다 했다. 버드나무는 여전히 연못 위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바람에 맞혀 살랑살랑 춤을 추고 있었다. 잔잔한 연못에 동그란 잔물결이 퍼져 나갔다. 그간 우기의 비로 목을 축인 잔디가 전보다 더 푸르렀다. 그 뒤로 새하얀 구름이 느리게 느리게 지나갔다.


다른 누가 보여주는 것이 아닌, 내 힘으로 내게 선물한 풍경이었다. 그건 예쁜 나무나 잔잔한 연못, 그 이상의 무엇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질 정도로 두렵더라도 여전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이자, 앞으로도 이렇게나 좋은 날을 또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이었다. 나쁜 생각만 떠오르는 날, 두고두고 꺼내보며 나를 다독일 수 있는 재료였다. 누구도 함부로 빼앗을 수 없는 온전한 내 것이었다.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곳에, 얼마든지 나를 데리고 올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실감이 들어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손 마디마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해방감이 차올랐다. 더는 누군가가 데려다주길 바라거나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가다가 궁금한 곳이 보이면 내 마음대로 멈춰서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길을 잘못 틀어서 헤매든 계획에도 없던 다른 곳에 가든 다 내 선택이고 책임이다.


나는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카페 안으로 발을 옮겼다. 테이블에 앉아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고 있는데 다 컸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그 순간만큼은 진짜로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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