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날이 여름
여느 날처럼 친구들이 하는 카페에 들렀다가 대화 카드 게임을 하게 됐다. 개별 카드에 적혀 있는 질문에 대답하면 되는 게임이었다. 내 순서가 돌아왔고, 카드에 적힌 질문은 이랬다. 힘들고 지치면 보통 어떻게 하나요? 한동안 뜸을 들이다가 그냥 쉬거나 운동하지 뭐, 하고 대답했다. 운동, 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친구들이 뻔하다는 듯 웃었다. 나는 웃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아아, 근데 여기 있으면 챙겨주는 사람 있어서 조금 나아.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이는 다우였다.
다우를 보면 오만한 마음이 눈치도 없이 튀어나온다. 내가 지금보다 많이 어리고, 다른 이들에게는 당연한 듯 허락되는 가능성에도 눈 감느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시절, 하루하루 살아남고 버티는 데 마음이 온통 소진되던 시절. 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꾸 그런 시절이 떠올라서 나는 새파란 내가 아까워 미칠 지경이었던 것처럼 걔가 아까워 미치겠다. 그러다가도 그렇게 함부로 닮은 구석을 찾아내는 나 자신이 가당치도 않다 싶다. 저마다 충실히 책임지고 있는 고통이나 아픔 같은 것을 단순하게 압축시켜 버린 건 아닐지 돌아보게 된다. 돌아보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간다.
내가 코코넛을 좋아하는 걸 알게 되면, 어느 날 갑자기 코코넛 음료를 스윽 내미는 사람. 우기의 비가 한바탕 쏟아질 때마다 내 오토바이 헬멧이 젖을까 봐 가져다주는 사람. 일하느라 카페와 베이킹룸이 있는 위층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도 나를 살피는 사람. 힘들어? 괜찮아? 그런 말로 나의 하루를 조금 나아지게 하는 사람. 외국인이라고 바가지 쓸까 봐 기어코 가게에 같이 가주는 사람. 밖에서 다쳐서 온 나를 보고는 일하다 말고 곧장 앞치마를 풀며 병원 가자고 말하는 사람. 안 그래도 불공평하게 기울어진 마음을 속수무책으로 잡아당기는 사람. 다우는 내게 그런 사람이다.
그런 이의 생일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모여서 생일 축하 파티를 준비하기로 하고, 카페로 들어서는데 한껏 슬퍼 보이는 다우가 있었다. 그의 생일을 모두 잊어버린 척 시치미를 떼고 있으니 사슴 같은 눈이 그렁그렁해진 것이었다. 그의 커다랗고 물기 어린 눈을 보자마자 달려가서 조금만 기다리라며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찬 기운을 뿜으며 카페 위층으로 후다닥 올라갔다.
“다우 짜 렁하이.” 친구들을 보자마자 이러다 다우 울겠다고 말하며, 방금 본 그의 얼굴을 따라 했다. 다우를 울릴 수는 없어서 우리는 빨리 생일 카드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생일 카드만큼은 꼭 태국어로 써주고 싶어서 마음이 더 급했다. 친구들이야 10분이면 쓸 테지만, 나는 아직 태국어 쓰기가 익숙하지 않은 탓에 A4용지 반장만큼만 쓰려고 해도 30분은 우습게 지나가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애들은 진즉에 다 쓰고, 저린 손을 줬다 폈다 하며 태국어 글자를 따라 그리고 있는 나를 응원했다. 선풍기 바람이 솔솔 불어와 머리카락을 간지럽히는데도 자꾸만 식은땀이 흘렀다. 다우가 기다리는데, 끄응.
간신히 카드를 다 쓰고, 케이크를 들고 카페로 살금살금 내려갔다. 미리 연습한 대로 케이가 기타를 치며 생일 축하 노래를 시작했다. 해피 버스 데이 투 유, 해피 버스 데이 투 유. 멜로디에 맞춰 나와 남파, 깨우도 목소리를 얹었다. 화음을 넣어가며 아름답게 마무리해 보려고 했지만, 전혀 조화롭지 않은 우리 목소리가 우스워서 깔깔대다가 박수로 어영부영 노래를 끝냈다.
“해피 버스 데이, 다우!” 다우 입가에 미소가 시원하게 퍼졌다. 케이크에 꽂힌 초를 불 준비를 하는 다우를 보고, 내가 손사래를 저으며 얼른 소원부터 빌라고 했다. 그는 웃는 얼굴로 눈을 감았다가 한참 후에야 초를 불었다. 다우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가 다른 사람의 행복과 안녕보다 그의 행복과 안녕을 빌었기를 바랐다.
생일이니만큼 우리는 작정하고 다우 입을 호강시켜 줄 생각이었다. 비싼 소고깃집에 가서 고기를 잔뜩 주문하고, 자주 보는 사이에서 오갈 만한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인기 초절정의 곰돌이 캐릭터한테 어깨동무했다가 맹비난을 받은 태국 인기스타가 결국 사과했다더라, 어제 뭐 했는데 피곤해 죽는 줄 알았고 지금은 배고파 죽겠다, 고기가 너무 맛있다, 더 시킬까, 그래 더 시키자, 어우 이제 배불러 죽겠다로 끝나는 그런 생일 밥상이었다. 그 많은 수다를 나누면서 각자 고기를 욱여넣는 동안, 다우는 자꾸 고기를 구워다가 남의 밥 위에다가 올려놓았다. 가뜩이나 마른 얘가 좀 많이 먹었으면 좋겠는데, 얘는 무슨 소고기에 핏기만 가시면 야들야들해진 고기를 날렵하게 채다가 남부터 주고 말이야. 너 먹어, 너 좀 먹어, 너 다 먹어. 다우는 얼마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배부르다며 배를 두들겼다.
밥 먹고 술을 한잔하다가 아까 뜬금없이 헬스장은 왜 가고 싶었냐고 다우에게 물었다. 잠깐 들른 헬스장에서 다 같이 땀을 한바탕 흘린 후였다. 예전에 하니가 헬스장 같이 가고 싶다고 했었잖아, 다우는 취기가 살짝 올라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얘는 자기 생일날인데도, 내가 지나가는 말로 하고 싶다고 했던 걸 기억해 뒀다가 그걸 한 거다. 생전 운동도 안 하면서. 나는 또 마음이 쩍쩍 갈라졌다. 그때 새삼 깨달았다. 너는 이런 사람이야, 다른 이를 이렇게나 챙기고 아끼는 사람. 그러니까 너는 내가 아껴줘야지.
다우가 가족과 떨어져서 보내는 첫 생일이었다. 그가 외롭기보다 그저 기뻤다고 기억했으면 했다. 어쩌면 그는 괜찮았을 수도 있는데, 혹여나 그가 쓸쓸하거나 슬프기라도 하면 공연히 내 속이 아프니 걔가 무지하게 행복하기를 바란 것 같다. 그러니까 그의 행복을 바라는 내 마음은 실은 무척이나 이기적이다.
주변 챙기느라 힘들게 살지 말고, 그 사람들 좀 힘들게 내버려두고서라도 걔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아마 걔는 그렇게는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일 테지만 나는 걔가 그렇게 행복해지는 법도 배웠으면 하고 욕심을 내본다. 자기한테 할당된 나쁜 운은 인생 초반에 다 써버렸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할 몫도 앞당겨서 다 해버렸다고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나 하나 잘살 수 있을지 그런 궁리도 하면 좋겠다. 그래서 속 끓이고 마음 아픈 날이 없어지기를, 이제부터는 자기 챙겨주고 돌봐주는 사람들을 훨씬 더 많이 만들기를.
생일 하루를 꽉 채워서 함께 보내고 헤어지기 전, 다우는 언제나 그랬듯 먼저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집에 가려는데, 사랑해, 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시동을 켜다가 말고, 사랑한다고 했다. 그 말 한마디로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해 줄 수 없는 걸 알지만, 그의 하루를 아주 조금 더 낫게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제 여러분의 메일함으로 여름이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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