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날이 여름
아침에 칫솔질하다가 거울을 보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오른쪽 볼과 턱 중간쯤, 불그스름한 여드름이 올라왔다. 손으로 살짝 건드려보니, 속깨나 썩일 놈이라는 느낌이 바로 왔다. 이 자식은 금방 사라지지도, 짜기 좋게 익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다 정수리 한가운데에 뭔가가 투명하게 반짝이는 것을 봤다. 모든 동작을 즉시 정지하고, 눈이 사시처럼 모일 정도로 거울 가까이 다가섰다. 워낙 모질이 얇아 빛을 받으면 가끔 흰머리처럼 보이는 머리카락이 있는데, 이번에도 그런 머리카락이길 바랐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이 언제 바라는 대로 되던가. 그렇다, 흰머리였다. 아직 잠도 다 안 깼는데, 여드름과 흰머리 연타라니.
요즘 나는 여드름과 흰머리, 두 개가 동시에 나는 희한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 두 개를 바라보고 있으면 뒤통수가 다 얼얼하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여드름은 끝이라더니 역시 어른들은 순 거짓말쟁이다. 지랄 맞은 사춘기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늙어가는 몸까지 돌보며 살아가야 한다니. 과거와 미래, 양쪽에서 세월을 정통으로 맞고 있달까. 한 번에 한 놈만 덤벼야 공정한 싸움이지 않을까, 이건 좀 억울하다.
작년까지만 해도 눈 조금 올려 뜬다고 이마에 이런 주름이 생기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영 낯설다. 그동안 얼마나 웃고 살았는지, 눈가주름도 벌써 선명하다. 요새는 웃다가 어딘가에 비친 나를 보면 흠칫흠칫 놀란다. 두렵다, 이 모든 변화가. 지금 직장 그만두고 끄적거릴 때야? 돈 벌어서 노후 준비도 하고 피부과 시술도 잔뜩 받아야 했던 거 아니냐고 자문하게 된다. 나만 이렇게 벌벌 떠나 싶어서 친구들한테 카톡을 보내면, 벌벌 떠는 30대 그룹 채팅이 돼버린다. 잔주름에는 스킨보톡스가 제일 자연스럽고 효과 좋다더라, 얼굴이 자꾸 쳐지는 것 같은데 더 늦기 전에 윤곽 관리 받기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니냐, 요새는 써마지가 인기래.
무슨 시술을 얼마나 받으면 괜찮아질까? 그것도 모르겠다. 돈이 엄청 많거나 대단한 사회적 성취를 이뤄내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질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 무엇도 지금 잃고 있는 젊음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젊음 하나로 찬란할 수 있는 시기도 끝나면 도대체 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젊음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다. 젊음은 젊음 그 자체로 반짝거려서 그런지 조금 실수하고 휘청거려도 사랑스럽다. 귀엽게 봐주고 넘어갈 뿐 아니라 심지어 선뜻 도와줄 마음마저 든다. 뭘 몰라서 불안하고 뒤처지는 것 같아서 불안했다지만 돌이켜보면 만회할 시간도, 다시 시도해 볼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 모든 걸 가능하게 할 체력이 있었다. 하루이틀 정도 잠 안 자고 무리해도 끄떡없어서 수면 시간을 아깝다고 여기기도 했다. 어렸을 때 늘 골골거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지금은 살면서 체력 관리에 이토록 진심인 적이 없었을 만큼 매일 운동하고, 8시간 수면 챙기고, 영양소 따져가며 밥 먹는데도 하룻밤 무리하면 느껴지는 데미지의 강도 자체가 다르다. 몸을 정상 궤도로 올리기 위한 복구 시간과 노력도 배로 든다. 이러니 뭐 하나 하려고 해도 까다로워진다. 한정된 시간과 체력 안에서 가장 필요한 혹은 가장 원하는 것 딱 하나만 고를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갈래로 나눠서 쓸 만큼 자원이 여유롭지 않달까. 도전할 때 부담의 크기가 커질 수밖에 없다.
가장 쓰라린 점은 더 이상 귀엽지 않다는 사실이다. 수줍게 웃으며 넘어갈 수가 없다. 일단 나부터 나를 슬쩍 봐주기가 잘 안된다. 덕분에 실수하거나 능숙하지 않을 때, 색다른 자괴감에 휩싸인다. 잘 이끌어야 할 것 같고, 그게 뭐든 매끄럽게 만들어야 할 것 같고, 방황은 적당히 그만하고 계획이나 전략도 있어야 할 것 같고, 질문보다는 정답을 훨씬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현실의 나는⋯. 얼굴과 몸에서 마주하는 노화는 이 모든 걸 자꾸만 상기시킨다.
시간에 젊음을 박탈당하고 쭉정이만 남은 존재가 아니라, 시간이 쌓여서 새롭게 태어난 존재이고 싶었다. 말 한마디 안 해도 세련된 여유로움이 느껴지고 언제든 줄 수 있는 지혜가 있는 어른. 폭풍우 속에서도 고요하고 안정적으로 균형 잡힌 어른. 그렇게 기품 있고 우아한 어른이라면 가능성도, 체력도, 탄탄한 피부도, 점점 사라져 가도 조금은 괜찮을 것 같았다. 나의 늙음이 그간 내가 얻은 것들에 대한 증표처럼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잃어가고 죽어가는 내가 아니라 지금보다 훨씬 좋은 무언가가 되어가는 나라면 견딜 수 있으리라, 그런 막연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어설프고 느리고 서투르다. 여전히 화나고, 슬프고, 기쁘고, 신나고, 흥분하고, 질투하고, 불안하고, 두렵고, 기대하고, 실망한다. 오히려 나이를 먹은 만큼 더 조급해졌다. 바로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 뿐이지,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온갖 마음이 거기 그대로 있다. 그렇게 대단하거나 멋지지는 않은 나와 함께.
아마도 그 들끓는 마음들은 어디 안 갈 것이다. 꿈꾸던 기품 있고 우아한 어른이 되기도 영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이제는 나를 인간으로 만드는 그 모든 마음들, 나를 나로 만드는 뚝딱거리고 모나고 부족한 부분을 다 몰아내고 뜯어고치기에는 내가 조금 늙고 지쳤다. 내내 미워하기에도 나 자신이 좀 안쓰러워 그만하고 싶어져 버렸다.
그냥 이대로 행복하고 건강하고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 되고 싶다. 느리게 완성되는 모든 것에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끝에 보이는 결과만이 아니라 시간이 빚어가는 모양새를 매일 들여다보고 어여삐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모든 흠결을 껴안고서도 그런 사람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지금보다 더 많이 축하하고 웃으면서 살 수 있을 것 같다.
보너스로 그런 사람은 얼굴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도 그렇게 원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주근깨에서 같이 첨벙거리던 바닷가의 햇살을 언뜻 보거나, 주름살 속에서 밤마다 배꼽 빠지게 웃으며 나눴던 이야기 소리를 들으며 즐거워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꽤 괜찮을 것 같다.
이제 여러분의 메일함으로 여름이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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