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자수와 플루메리아

모든 날이 여름

by 하니Hani

그날 아침, 나는 안 쉬어지는 숨을 억지로 뱉어내며 벌벌 떨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안 가본 글쓰기 모임을 가기로 한 날이었다. 치앙마이에서의 일상은 매우 평화롭게 흐르고 있었는데 호기롭게 스스로 그 패턴을 깨버린 것이다. 거짓말 같았다. 이 모임을 진짜 내가 가겠다고 한 게 맞나? 아침부터 온몸에서 피가 쭉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작가도 아닌데 가도 되나 하는 생각이 맴돌아 사지에 힘이 풀리고 심장이 쿵쾅거려서 어지러웠다. 하필 모임 장소도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좀 더 멀어서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일찍 도착하기까지 했다.


미팅룸 문을 살짝 열어보니 이미 대여섯 명 정도가 먼저 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영어권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절대다수였고, 비영어권 국가 출신은 한국인인 나와 이스라엘 사람 한 명뿐이었다. 더군다나 아시안은 나 혼자였다. 절반 이상이 치앙마이에서 10년 이상 거주한 사람들이었고, 그에 비해 나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었다.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기가 팍삭 죽었다. 하다못해 화이트보드 지우개조차도 찰떡같이 제 자리에 있는 것 같은데 나만 잘못 온 손님처럼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도망치는 건 어떨지 잔머리를 굴렸다.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배가 아프다고 하는 게 나을까. 후진 변명만 생각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호스트가 규칙을 설명하며 모임을 진행했다.

아무 글이나 쓰세요. 글 쓰는데 필요한 자료 조사를 해도 되고요. 쓰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건 뭐든 해도 돼요.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요.

그가 설명한 대로 규칙은 매우 간단했다. 무엇을 쓸 계획인지, 무엇을 썼는지 공개할 필요도 없었다. 당연히 서로의 글을 평가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모두 엉덩이를 붙이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미팅룸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치앙마이에 난생처음 여행 왔던 시기의 메모를 끄집어냈다. 생각의 조각들을 글로 만들려고 애쓰는 내내 아주 오랫동안 쓸 무언가를 쓰기 시작한 기분이었다. 기억을 헤집고 다니며 이리저리 내용을 덧붙이자, 메모보다는 글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동안 키보드를 두드리다 보면 익숙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너는 참 횡설수설, 적당히를 모르는구나. 선을 잘 모른달까. 그러면 또 줏대 없는 손가락은 기껏 쓴 글을 몽땅 지웠다. 그렇게 꾸역꾸역 써 내려간 초안을 다듬으니 1시간 후에는 고작 한 문단이 남아 있었다. 이걸 문단이라고 불러도 될지, 다시 메모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자마자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다들 지난 1시간이 꽤 절망스러웠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도 한 명 없었다. 나도 어깨를 주무르며 창밖에 잘 가꿔진 정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새파란 잔디밭 위에 커다란 나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금발의 백인 두 명이 노트북 화면을 골똘히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후덥지근한 날씨 탓에 땀에 젖은 피부가 반짝거렸다. 키 큰 야자수와 풍성하고 새하얀 플루메리아 꽃송이 위로 태평하게 해가 쏟아졌다. 내 머릿속은 지난 1시간 동안 나를 괴롭혔던 목소리로 번잡하고 수선스럽기만 한데⋯.


그때 스코틀랜드에서 왔다던 한 참가자가 시 낭송 모임 이야기로 미팅룸에 짙게 깔린 좌절감을 환기하려 했다. 그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10분짜리 쉬는 시간이 1시간 30분짜리 성토대회로 변질되고 말았던 것이다. 몇 년에 걸쳐 시 모임에 참여해 온 사람들은 최근 들어 바뀐 모임의 성격을 꼬집었다. 사생활이나 트라우마를 미주알고주알 떠들며 소위 시라고 부르는 작자들을 향한 실망과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내면의 상처를 '시'라는 미명 아래 밤새 들어줘야 하는 괴로움에 대해서도 토해냈다. ‘솔직하게 썼다는 이유만으로 일기가 문학이 될 수는 없다구욧!’, ‘그건 나르시시즘이라구욧!’. 처음 말을 꺼낸 사람은 얼빠진 얼굴로 앉아 있었다. 나 역시 과열된 분위기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짐짓 괜찮은 척하며 일기와 문학의 차이가 과연 무엇일지 고민에 빠졌다. 좀 전에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목소리가 또다시 속삭였다. 너는 적당히를 모르는구나. 따끔.

일기가 문학이 될 수 있는 기준은 아직도 모르겠다. 무엇이 자질구레한 개인사나 트라우마를 문학으로 만드는가. 그 결정은 누가 하지? 어떤 이야기는 이야기 할 자격이 있고, 어떤 이야기는 침묵해야 하는 걸까. 얼마만큼 솔직해야 문학적으로 탁월하게 솔직한 거지? 역시나 물어볼 걸 그랬나. 여름날 무성히 자라는 잡초처럼 무수히 생겨난 질문들은 한해가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적당히’ 존재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해 왔다. 세상에서도, 글에서도 그런 식이었다. 적당히 겸손하고, 적당히 기뻐하고, 적당히 슬퍼하고, 적당히 분노하고, 적당히 꿈꾸고, 적당히 욕망하고, 적당히 좋아하고, 적당히 미워하고, 적당히 듣고, 적당히 말하고, 적당히 적당히 적당히.

동시에 그렇게 ‘적당히’ 존재하려는 내 자신이 견디기 어려웠다. 여기 이렇게 내가 있잖아. 숨 쉬고 느끼며 아마도 오직 단 한 번, 이번 한 번만 존재하는데 어떻게 ‘적당히’ 있을 수 있지?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을 불편하거나 지루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응당 예의 바른 미소를 짓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쓰기가 하루의 전부가 되다시피 한 지금도 흰 화면과 검은 글자를 뚫어져라 보며 버릇처럼 예의 바른 미소를 그려낸다. 위험하지 않게, 부담스럽지 않게 세공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지금도 이 글에 적당히 괜찮은 결말을 찾아 마무리 짓고 싶은 충동이 온몸을 감싼다. 내 이야기 따위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걸 아는 지금조차. 나에게만 의미 있는 인간들과 사건들로 일기 대신 글을 써내겠다고 이 먼 곳까지 와서 지내는 지금조차. 세상에 도움 되거나 중요한 이야기가 아닌 걸 인정하면서도 기어코 쓰는 지금조차.


실은 내가 얼마나 욕심 많고, 나로 가득 차 있고, 행복해 죽겠고, 어떨 때는 억울해서 환장할 것만 같고, 답답해서 소리 지르고 싶고, 힘들다고 징징거리고 싶고, 외롭다고 안아달라고 매달리고 싶고, 때려 부수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기도 하고, 미워 죽겠고, 무섭고, 불안하고, 흥분되고, 질투 나고, 신나고, 멀어지고 싶고, 가까워지고 싶고, 도망치고 싶고, 해내고 싶고, 끔찍하게 잘 살고 싶은지, 아무것도 모르겠는지, 그렇게 쥐뿔도 모르겠는데 왜 이토록 뭐라도 써내고 싶은지 그런 것들을 쓰기에는 나는 너무 두렵다. 누군가 그런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내가 뱉어낸 활자들 속에서조차 외톨이일 것이다. 나는 결국 누군가를 괴롭게 만들기만 한 사람이 될 것이다. 외로워지고 싶지도, 다른 이를 괴롭게 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결국 내가 잘 쓸 수 있는 풍경과 상황과 인물 속으로 들어가 머문다. 본능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끼는 장소와 사람들 곁으로 숨어 들어간다.


맹렬하게 쓰고 싶다. 나 혼자 보는 일기가 아니고 싶다. 글이 되고 싶다. 문학이 되고 싶다. 의미가 되고 싶다. 줄줄 새어 나오는 나를 내버려두고 싶다. 아예 흘러넘치고 싶다. 넘쳐버려서 우리 사이의 선을 넘고 싶다. 끝내 당신과 닿고 싶다. 그럴 수 있도록 맹렬하게 쓰고 싶다. 그럴 수 있도록 맹렬하게 살고 싶다. 키 큰 야자수와 풍성하고 새하얀 플루메리아 꽃송이 아래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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