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머가 될 건 아닙니다만

모든 날이 여름

by 하니Hani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매해 무엇이 되고 싶은지 다음 주까지 적어 오라고 했다. 그러면 그때그때 적당한 것을 적어서 내곤 했다. 아빠가 좋아할 만한 것, 선생님이 알려준 것, 애들이 멋있다고 한 것, 텔레비전에서 봤던 것 등등. 진심으로 되고 싶은 것도 있었고 아닌 것도 많았다. 이해는 안 됐지만 어렴풋하게나마 받아들였다. 무언가가 되어야만 하나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시간이 등을 떠밀어서 내가 적지 않은 것들도 자꾸 되어갔다. 의무 교육을 거쳐 대학생이 되고 취준생이 되고 어찌저찌하다 보니 직장인까지 되었다. 무언가를 하는 것은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조금 당황했던 것 같다. “왜 하려고 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글쎄, 그러게요. 드러머가 될 것도 아닌데 왜일까요. “그냥 해보고 싶어서요.” 겸연쩍게 웃으며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나는 정말 드럼이 해보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집에서 한 시간이나 떨어져 있는 이 연습실까지 올 이유가 없었다.


강사는 취미로 하는 거라면 기본 패턴을 금방 익히고 원하는 노래를 연습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빨리 배우는 사람은 쉬운 곡은 한두 달이면 연주한다면서 처음 해보고 싶은 노래를 물어봤다. 그렇게 빨리 연주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나는 당장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난달에 봤던 공연 중에 제일 좋은 게 뭐였더라⋯.

“지금 듣고 싶은 노래가 뭐야?”

워낙 자주 보러 가다 보니 서로가 익숙해진 밴드의 보컬이 물었다.

“음… Until I found you.”

“오케. 알았어.”

아, 다른 노래 말할걸. 너무 놀라서 떠오르는 아무 노래나 말해버렸다.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다. 벌써 일렉 기타가 조용히 곡을 시작했다. 부드러운 보컬이 낮게 깔리고 금박지가 부서지는 것만 같은 소리를 내며 드럼이 합류한다. 옆에 큰 쟁반 같은 것을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스틱으로 튕겨 내며 치면 별이 쏟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스틱을 잡은 손은 재빨리 바로 앞에 있는 드럼으로 옮겨 간다. 수평으로 잡은 스틱을 테두리에 탁탁하고 내려치면서 일정한 박자를 만들면 어쩐지 노래가 훨씬 멋있어진다. 곡의 절정으로 가면 다시 한번 큰 쟁반 같은 것을 연달아 친다. 쨍쨍거릴 것 같지만 예쁜 소리가 난다.

이거다. 이 곡을 처음으로 치고 싶어.


한 달은 생각보다 빨리 갔다. 일주일에 수업 한 번, 연습하러 두 번을 오가고 나면 눈 깜빡할 새에 또다시 월요일이 다가오는 식이었다. 그 사이 드럼 양 끝에 있는 쟁반 같은 것들은 크래시와 라이드, 드러머 바로 앞에 놓인 것은 스네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크래시에서 스네어로, 스네어에서 라이드로, 다시 각종 사이즈의 탐으로 손을 옮기고, 발로는 베이스 드럼을 쳐서 가장 묵직한 박자의 틀을 만드는 데에도 익숙해졌다. 수업 시간에 배운 8비트와 16비트 기본 패턴만 연습해도 연습 시간이 뚝딱 끝나 있었다. 같은 패턴이어도 80에서 100, 110으로 속도를 올리면 그새 한두 음표씩 틀렸다.

남들이 들으면 뭘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을 쨍그랑 둥둥 소리를 반복하는 데 빠져들어 갔다. 메트로놈 속도를 올리면 심장 박동도 올라갔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집중하다가 한두 음표씩 틀리면 아쉬움의 탄성이 나왔다가 갑자기 혼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틀려도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는 게 짜릿했다. 그 한두 음표를 110에 맞춰서 치고 나면 불편한 의자 때문에 주먹으로 쳐가며 풀어주던 허리도 쌩쌩해지는 것 같았다. 다음 수강생을 위해서 미리 연습실을 비워주면 좋겠지만 1분도 먼저 나가기 싫어서 늘 예약한 시간을 꽉꽉 채웠다.


신기하게 진도도 쑥쑥 나갔다. 이 속도대로라면 한 달도 안 돼서 연주를 시작할 것 같다고 했는데 그 말은 사실이 되었다. 강사는 이번 수업 때 바로 시작하게 될 줄 몰랐다며 인쇄하지 못한 악보를 아이패드로 보여 주었다. 그는 곧바로 쳐보라고 했다. 먼저 시범을 보여주거나 할 줄 알았는데 그럴 기미는 없었다. 못 할 것 같다고 으레 생각하며 악보를 쓱 훑어봤다. 연습했던 패턴과 똑같진 않지만, 놀랍게도 악보는 무난하게 읽을 수 있었다. 공중에 대충 연습해 볼 요량으로 둥둥 손을 움직이니 드럼에 스틱이 닿았다 떨어졌다 하며 내가 들었던 것과 비슷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오, 할 수 있나 보다. 할 수 있겠다. 라이드를 조심조심 연속해서 치니 별이 쏟아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공연 때마다 자주 들어 익숙해진 별이 쏟아지는 소리. 아주 느린 노래인데도 심장이 빨라지는 것 같았다.


공연으로 듣기만 할 때는 다른 악기와 섞여서 잘 못 느꼈는데 드러머 입장에서 Until I found you는 정말 시시한 노래였다. 박자의 변주도 거의 없고 같은 패턴의 반복이 대부분이었다. 패턴만 따로 처음부터 끝까지 치면 틀리기가 더 어려웠다. 그런데 노래를 틀어 놓고 맞춰서 연주하려고 하기만 하면 패턴이 바뀔 때마다 툭툭 끊겼다. 실제 노래 속도보다 훨씬 빨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음표 하나만 틀리면 그다음은 어떻게 따라붙어서 계속 쳐야 할지 난감했다. 그때마다 스틱을 내려놓고 멍하니 다시 제 속도로 흘러가는 노래를 듣다 보니 어느새 예정된 수업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조급해질수록 자꾸 틀리고 조지아에게 애절하게 사랑을 전하는 노래는 야속하게 흘러만 갔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해보고 다음에 이어서 또 하죠.”

유난히 긴 간주가 마지막으로 흘러나왔다. 하나, 둘, 열까지 세고 마침내 스틱을 들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이제는 틀릴 수 있는 곳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틀렸기 때문에 더 이상 창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모든 음표가 스틱에 착착 붙는 것 같았다. 악보를 보느라 눈으로 드럼을 못 봐도 헛손질하지 않고 스틱은 움직여야 하는 위치로 탁탁 이동했다. 손과 발이 느려지지도 빨라지지도 않고, 노래는 다시 제 속도에 가까워졌다. ‘I was lost within the darkness, but then I found her. I found you.’ 5, 60년대 분위기를 잔뜩 풍기는 가수의 목소리가 마침표를 찍어 갈 때, 내 드럼 소리도 점점 작아지다 완전히 조용해졌다.

“뭐야, 왜 갑자기 하나도 안 틀렸어요! 아, 이거 동영상 찍었어야 했는데…”

“아, 뭐야 뭐야, 그러게요, 저 왜 하나도 안 틀렸어요?”

“진짜 아쉽다. 다음에는 더 어려운 거 해봐요.”


스틱을 잡을 때 가장 좋은 점은 그 무엇도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시간이 그 어떤 결과물로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드러머가 될 게 아니었다. 잘해야 하는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습관처럼 잘할지 못할지 생각하다 보면 박자만 놓칠 뿐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스틱을 쾅쾅 내리치고 발을 크게 굴러 북소리가 연습실을 가득 채우면 그게 그렇게 통쾌할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 무언가를 했던 내가 조금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무언가가 되어야 하니까 어련히 잘해야만 했던 그 긴 시간 동안 딱딱해진 마음에 자주 균열이 갔다. 그렇게 금이 쩍쩍 갈 때까지 드럼을 연습하다 보면 어느새 좋아했던 가수나 밴드의 곡을 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제 어디선가 그 노래들이 흘러나오면 ‘아, 이거 나 할 줄 아는데!’ 하는 생각에 잔뜩 신이 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안녕하세요, 모든 날이 여름을 연재 중인 하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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