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키스는 사과맛

모든 날이 여름

by 하니Hani

게으른 오후의 햇살을 맞으며 커피를 한 모금하고 가져온 책을 펼쳤다. 글의 제목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약간 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 ‘첫 키스는 사과맛’이라니, 사기잖아. 의자에 거의 드러눕듯 늘어져 있던 몸이 퉁겨져 올라왔다. 전 인류가 나만 빼놓고 어떤 공모를 하기라도 한 것처럼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첫 키스가 사과맛이라는데 너도 그랬어? 옆에서 마찬가지로 책을 읽고 있던 케이에게 물었다. 뜬금없는 내 질문에 친구는 조금 얼이 빠진 듯 했다. 아니이이이, 누가 그렇대? 날뛰려던 나의 신경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적어도 나만 못 느껴본 건 아니었다. 책에서 사과맛이었대, 나는 그냥 외계인 침공 같았는데. 우리는 깔깔거리고 웃었다.


케이와 나는 한동안 첫 키스를 표현할 만한 여러 맛을 떠올려봤지만 역시 사과맛일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도대체 어떤 첫사랑을 했기에 그런 맛이 났을까. 사랑이 아니라면 느낄 수 없는 맛일 게 분명했다. 그건 어련히 내 마음을 받아주리라는 믿음이 배 있는 천진한 사랑 같은 게 아니었을지. 혹은 사랑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뭐든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 그것도 아니면 상처를 준 적도, 받은 적도 없는 깨끗하고 말간 마음. 그것도 아니라면 시간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르고 순진하게 영원 같은 것을 그려보는 마음, 그런 것이려나.


정작 천진한 사랑을 할 법한 나이에는 그런 사랑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하나같이 시시한 남자애들이었다고만 기억하고 있었다. 짝꿍을 만나기 전에 영어덜트 소설에나 나올 법한 풋풋하고 두근거리는 연애 한 번 못 해 본 게 억울하다면 억울하달까. 그런데 돌아보니 나는 시시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걔네를 잘 알지 못했다. 뭘 좋아하고 싫어했는지 같은 간단한 것조차 기억이 안 난다고 하고 싶지만, 그때도 잘 몰랐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도 어지간히 별로인 여자 친구였던 것이다. 상처받는 게 두려워서 사랑하기는커녕, 사랑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믿음, 내게 그런 건 없었다.


나 좋다는 사람이 나타나도 일단 의심부터 하기 바빴고, 늘 상대가 무언가 단단히 착각한 게 틀림 없으며, 따라서 그 마음이 지속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예언자라도 되는 것처럼 다가올 미래를 보고 있었다. ‘분명 어느 날 갑자기 떠나서 내 마음을 부숴놓을 것이다.’ 당연히 나는 마음 여는 것은 고사하고, 늘 전전긍긍하고 왜곡하고 예민하게 굴며 사랑을 부정했다. 나를 낳아주고 키워준 사람들도 내가 끔찍한 인간이라는데, 세상 그 누가 나를 사랑해 줄 수 있겠는가. 그 당시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그런 것이었다. 나를 그냥 좀 사랑하게 내버려뒀다면 우리도 아플지언정 사과맛이었다고 추억할 만한 사랑을 했을지도 모르는데⋯.


나의 경우,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른 것을 믿고,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건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나의 저주 같은 예언을 실현해 준 이들 이후에 내 마음 대신 내 믿음을 산산조각 내준 이가 도래했고, 그는 정말이지 끈질기게 나와 달리 생각하고, 느끼고, 믿었다. 그는 내가 아주 멋지고 아름다운 면을 가진 보통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때때로 이렇게 별로일 수가 없고 여기저기 흠결도 보이지만, 여전히 사랑 받을 만한 사람으로 바라봐주었다는 말이다. 나는 대단한 인간도 아니었고, 최악의 쓰레기도 아니었다. 나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공부하고 일하지만, 동시에 아주 늦게 자고 지나치게 늦게 일어나는 게으른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누구보다 다정하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휴지를 내밀 수도 있지만, 날 선 눈으로 노려보며 불같이 화를 낼 수도 있었다. 나는 실수를 할 수도,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지만, 여전히 사랑받을 가치가 있었다. 여느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그렇게 강산도 변한다는 시간이 흐르고 나니 천진한 사랑은 실은 한 번도 상처받지 않고, 그 무엇도 겪어보지 않은 마음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겪고도 서로를 받아들이는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겠다. 꾸미지 않은 나를 오늘도 있는 그대로 받아주리라는 믿음, 그런 믿음이 배 있는 사랑이 얼마나 정성스럽고, 귀하고, 강인한 사랑인지도. 이렇게 좋은 것은 역시나 처음부터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변덕스러운 봄도 지나고, 여름의 땡볕도 버티고, 가을 정도는 됐을 때 겨우 얻을 수 있는 게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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