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는 사이

모든 날이 여름

by 하니Hani

그날 밤의 폭우를 계기로 내 생애 첫 헬스장 커뮤니티가 생겼다. 그들 덕분에 고독하게 이 악물고 운동하는 맛은 좀 덜하지만, 대신 새로운 재미를 많이 찾았다. 가령 도와줄 사람이 생겼으니 망설이던 중량에 야심 차게 도전해 본다던가, 같이 운동하면서 새로운 루틴도 시도해 볼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변화가 좀 뜸했던 때라 오랜만에 성장하는 느낌이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다. 효과 좋았던 운동이나 재활 팁을 공유하는 것도 물론 유용했지만, 똑같은 것을 좋아하고 심지어 열과 성을 다한다는 점이 무엇보다 좋았다. 적어도 그 점에서는 많은 것이 통했다.


저녁을 푸짐하게 먹고 운동하면 속이 부대끼니까 운동 전후로 식사를 나눠서 먹는 습관도 그중 하나였다. 우기의 끝물 무렵, 각자 운동을 마치고 다 같이 헬스장 앞에서 밥 먹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그날은 수끼를 먹으러 갔다. 고기와 채소를 단순하게 끓이고 볶은 냄새가 맛깔났다. 든든하게 먹을 욕심으로 이미 닭고기를 넣은 수끼에 닭고기를 한 번 더 추가하고, 좋아하는 시메지 버섯도 추가했다. 슴슴한 채수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끈한 김을 보자 한동안 사라졌던 식욕이 돌아오는 듯했다. 국물을 맛보니 안도의 한숨 같은 게 흘러나왔다. 난생처음,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떨 때는 음식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올라와서 곤혹스러웠다. 평소 잘 먹던 음식을 먹으러 가도 한두 숟갈 뜨는 게 최선이었다. 다시 한번 국물을 숟가락 가득 떠서 넘겼다. 목부터 뱃속까지 편안하고 따뜻해졌다. 아아, 역시 수끼. 이건 정말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딜 가나 삶은 계란을 꼭 들고 다니는 바오가 부스럭거리며 계란을 꺼냈다. 넉넉하게 삶아 온 계란을 한 알씩 나눠주고, 자기 몫 네 알의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각자 시킨 수끼도 점점 양이 줄어 어느새 바닥을 보이는 그릇이 많아졌다. 분명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나는 또 입에 넣은 음식을 삼키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아, 천천히 먹어.” 옆에 앉은 아이라가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며 말했다. 얘는 세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그렇게 부들부들한 면이 있었다.

이미 밥을 다 먹은 에반도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 그릇을 봤다. 어제도 애들이 한 그릇을 뚝딱 비울 때까지 몇 입 먹지 못해 계란이랑 고기라도 골라 먹으라고 잔소리를 한 터였다.

나도 처음 음식이 나왔을 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은 그릇을 내려다봤다. 도대체 추가는 왜 그렇게 많이 한 건지.

에반은 나를 부르더니, 바오가 준 계란을 가리키며 먹을 거냐고 물었다. 산처럼 쌓여 있는 수끼만 먹기에도 벅차 도저히 계란까지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또 못 먹겠다고 대답하기는 싫었다.

“왜? 너 줄까?” 나는 걔가 욕심낸 게 아닌 걸 알면서도 괜히 물었다.

“아니, 네가 꼭 먹었으면 좋겠어.”

말없이 수끼를 뒤적거리자, 에반은 한 소리 덧붙였다.

“그러다 근육 다 빠진다.”

나는 숨죽은 배추와 닭고기를 한 젓가락 집어 입에 넣었다.


밥으로 잔소리를 들어본 적이 별로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 들어봤는지 기억도 잘 안 났다. 안 먹으면 안 먹는 거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줄 테니까 오늘은 꼭 다 먹으라고 하거나 남겼다고 한 소리 하는 사람이 너무 낯설었달까. 밥 싹싹 다 먹었다고 박수 받는 기분은 또 얼마나 얼떨떨하던지. 4살이 아니라서 좀 창피하기도 했다. 근데 싫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간 나한테 필요했던 건 이런 사이 같기도 했다. 벼르고 벼르다 특별한 약속 잡고 만나는 거 말고 그냥 자주 얼굴 보는 사이, 그래서 서로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어련히 아는 사이. 죽고 못 사는 우정이나 운명 공동체 못지않은 친구는 아닐지라도 밥 못 먹는 거 걱정해 주고, 계란 한 알 챙겨주면서 먹으라고 잔소리하는 사이. 진짜 먹기 싫은데 한 숟갈이라도 더 뜨게 만드는 그런 사이. 언제고 기댈 수 있고 내가 폭삭 주저앉지 않게 떠받쳐주는 기둥 같은 베스트 프렌드 한 명도 좋지만, 이런 사이도 엄청 좋다. 이런 사이도 모이고 모이면 기둥이 될 수 있다는 걸 얘네한테서 배운다.




안녕하세요, 모든 날이 여름을 연재 중인 하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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