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할머니 중에서

모든 날이 여름 - 시즌2

by 하니Hani

헬스장에 며칠 만에 나타난 시유를 보고 깜짝 놀란 건 그의 머리 때문이었다. 지난주만 해도 멀쩡했던 머리가 빡빡 깎여 있던 것이다. 할머니 장례식을 치른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충격적이었구나 싶어서 위로의 말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입만 뻥긋거리는 나를 보고, 다른 친구가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태국에는 손자가 머리 깎고 잠깐이라도 출가해서 큰 공덕을 쌓으면 조부모님이 좋은 곳에 갈 거라는 믿음이 있다고 했다. 까까머리를 쓱쓱 문지르던 시유는 눈썹도 밀었다면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부엇’도 했으니 좋은 곳에 가셨을 거라며 하던 운동을 이어서 했다.


시유와 달리 나는 부엇은커녕, 할머니한테 잘 가라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좋은 곳이 무언지도 잘 몰랐다. 어린 눈에는 모든 게 이상해 보이기만 했다. 할머니가 방에서 나와 보지 않는 것도, 까무잡잡했던 할머니 얼굴이 종잇장처럼 새하얘진 것도, 아빠가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우는 것도 다 낯설어서 겁이 덜컥 났다. 뒷걸음치다가 방 끝에 달라붙는 나를 보고, 큰고모가 밖으로 데리고 나가며 말했다. 애기는 이런 거 보는 거 아니야, 알록달록한 사탕도 하나 쥐여주셨는데 먹지는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운동 끝나고 샤워까지 개운하게 했는데도 잠이 잘 안 왔다. 할머니 생각이 나서 한참을 뒤척였다.


하루는 할머니랑 내 팔 두 개를 나란히 두고, 이리저리 만져 보다가 할머니 팔에서 희한한 점을 찾아냈다. 할머니 점은 왜 파란색이야? 나란히 찍혀 있는 푸르스름한 점 세 개를 가리키며 물어보니, 할머니는 점이 아니라 친구들이랑 문신을 한 거랬다. 젊었을 때, 바늘이랑 실에다가 까만 먹을 먹여서 점을 찍은 거라고. 세 명이어서 세 개를 찍었다고. 그 소리를 듣고 어찌나 놀랐던지. 많이 아팠어요, 할머니? 그랬더니 할머니는 별로 안 아팠어, 그렇게만 말했다. 바늘로 살을 뚫는데 안 아플 수도 있다니. 신기한 마음에 손톱보다도 작은 파란 점 세 개를 연신 만졌다.

지금이었으면 할머니한테 매칭 타투를 할 정도로 가까운 친구가 세 명이나 있었다는 사실에 더 놀랐을 거다. 할머니가 좀 잘나가기도 했나 싶어 소싯적 이야기도 꼬치꼬치 캐물어 봤을 테고⋯.


할머니한테서 제일 인상 깊은 기억은 문신이지만, 제일 자주 떠오르는 건 대청마루에 앉아 계시던 모습이다. 언제 가던 할머니는 늘 시골집 마루에서 농사지은 마늘을 손질하고 계셨다. 누구 혼내거나 싫은 소리도 않고, 티 나게 칭찬하거나 추켜세우지도 않고, 주변에서 뭘 하던 하루 종일 마늘 껍질만 대야 수북이 쌓고 또 쌓던 할머니.

마늘 대야 옆에 더 큰 대야가 있는 날은 무척 신나서, 차멀미도 잊고 마루로 뛰어올랐다. 그 커다란 대야에는 항상 삶은 꼬막이 산처럼 쌓여 있고, 쇠숟가락 두어 개가 무심하게 놓여 있었다. 한번은 그 많은 꼬막을 미련하게 다 먹고는 심하게 체하기도 했다. 그렇게 된통 당했으면 싫어질 만도 한데, 그렇지는 않았다. 한밤중에 도착했어도, 속이 울렁거려서 물 한 모금 마시기 싫었어도, 꼬막만큼은 항상 남기지 않고 먹어 치웠다. 꼬막이 정말 맛있어서 그랬다고만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여기까지가 할머니에 대한 나의 기억 거의 전부다. 좀 죄송한 소리지만, 그렇게 대단하거나 재미있는 분은 아니었다. 할머니가 넘치다 못해 흘러내릴 정도로 사랑을 쏟아 부어주셨다거나 특별히 나만 예뻐해 주시지도 않았다. 그래도 큰 상관 없었다. 말수도 적고 딱히 놀아주지도 않으셨지만 우리 할머니라서 마냥 좋았다. 세상에 있는 모든 할머니 중에서 제일 좋을 만큼 좋아했다. 할머니가 바뀌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할머니는 할머니 그대로 최고의 할머니였다. 종일 대청마루에 나란히 앉아 같이 있고 싶었고, 할머니의 쪼글쪼글한 피부를 만지고 싶었다.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게 더없이 좋았고, 할머니한테서 나는 마늘 냄새를 맡으면서 할머니랑 자는 게 너무너무 좋았다.

그건 어린이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었다. 그저 가족이라는 이유로 무턱대고 사랑해 버리기, 세상에서 제일 많이 사랑해 버리기. 어린이일 때만 사용할 수 있었던 막강한 초능력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든, 할머니는 계속 그리울 것 같다.



안녕하세요, 모든 날이 여름을 연재 중인 하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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