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친구가 되자

모든 날이 여름 - 시즌2

by 하니Hani

남파가 짐짓 어두운 얼굴로 말한다. 우리 친구가 되자, 우리 그냥 친구가 되자. 걔 눈동자가 조금 흔들린다. 나란히 앉은 우리 사이로 바람이 지나든다. 건조한 회벽에 걸려 있는 빨간 편지함이 눈에 띈다. 으응. 나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걔는 손을 조심스레 비비다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이제 가자, 나도 걔를 따라 일어난다. 바람이 자꾸만 분다. 그늘이 되어주던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흔들린다. 먼저 가던 남파가 어느새 다시 우리가 앉아 있던 벤치에 앉아 있다. 나도 그 옆에 앉아 걔의 얼굴을 보고 있다. 걔는 다시 말한다. 우리 친구가 되자, 우리 그냥 친구가 되자. 빨간 편지함이 눈에 들어오고, 내가 대답하고, 남파가 일어나면 나도 일어난다.


혼자 산책하는 내내 그렇게 남파가 비집고 들어온다. 우리 친구가 되자, 우리 그냥 친구가 되자. 한 바퀴 돌고, 또 한 바퀴를 돈다. 같은 곳을 도는 동안, 머릿속에도 같은 장면이 반복된다. 한 시간 동안 몇 바퀴나 돌았을까 생각하던 차에 내 얼굴이 일그러진다. 괜히 팔다리를 더 크게 흔들면서 걷는다. 씩씩하게 몸을 움직이면 눈물이 좀 들어간다. 그러다 별안간 벼락같은 생각이 꽂힌다. 삽시간에 팔다리를 지나치게 흔들고, 코를 너무 자주 훌쩍이는 볼썽사나운 사람이 된다. 아, 걔가 말하는 친구가 뭔지도 몰랐으면서 아는 척을 해 버렸다.


어른이 되면서 생각한 이상적인 친구는 이런 존재였다. 물러나 주는 사람이랄까. 나보다 더 중요한 가족도 생기고, 아주 바쁘기도 하니 함부로 시간을 빼앗지 않고, 가뜩이나 지치고 힘든 삶에 괜한 무게를 더하지 말아야 했다. 누군가를 웃게 하거나 가볍게 해주는 재주는 없으므로 그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었다. 그런 친구가 되려면 혼자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 많았다.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활의 어려운 점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단속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혼자 웅크리고 힘을 모아야 하는 시간이 잦고 길어졌지만, 그래도 좋은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날 마주한 남파의 얼굴은 내가 썩 좋은 친구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쩐지 상처받은 것처럼 보였다. 걔는 나의 몇몇 말들을 되풀이하며 속상함을 쏟아 놓았다. 바쁠 테니 가보라는, 그 일은 혼자 할 수 있다는 말들에 자기가 얼마나 밀려나는 기분인지 설명했다.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부정해 봤지만, 서운한 마음을 달래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남파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바쁘거나 귀찮을 거라는 생각은 네 추측이잖아? 이제는 내가 널 도와주고 싶어 한다고 추측해 봐.”

걔가 말하는 도움은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들이었다. 혼자 해보려다 지쳐서 놓고 싶어 하는 일들을 직접 거들고 싶어 했다. 그러려면 걔의 시간을 많이 쓸 게 뻔했고, 걔 어깨에 짐을 하나 더 얹어야 했다. 기꺼이 폐를 끼치는 존재가 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건 내가 오랫동안 고수해 온 이상적인 친구의 상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확실히 손 많이 안 가고, 편리한 친구였을 거다. 그러나 기댈만한 친구도 아니었을 거다. 삶을 어렵게 하지는 않았겠지만, 결코 쉽게 만들어 준 적도 없다. 혼자 방에 처박혀 있을 때, 억지로라도 끄집어내서 세상과 연결해 주는 친구라거나 무슨 일 생기면 나서서 거들어 주는 그런 친구이지도 않았다. 바라던 바와 달리, 대단히 좋은 친구는 아니었던 셈이다.

물러나 주는 것. 그건 실은 거절이 두렵고, 멀어지는 게 외롭고, 그저 피곤하고 게으른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 마음을 품고 사는 게 어려워 내 속 편해지자고 그럴싸하게 뭐라도 만들어낸 것이 아닐지.


남파는 고양이를 봐달라고 부탁하고, 내 앞에서 울어버릴 때도 있다. 속상한 일을 한참이나 얘기하고, 가끔은 가게 심부름도 시킨다. 생각했던 이상적인 친구와는 여러모로 거리가 먼데도 나한테는 되게 좋은 친구다. 물러나 주기는커녕 자꾸 내 삶에 자기를 집어넣는 그에게 자주 고맙고 부끄럽다.



안녕하세요, 모든 날이 여름을 연재 중인 하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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