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날이 여름 - 시즌2
이사한 집에서 맞는 첫날이다. 같은 방을 몇 번이나 쓸고 닦고, 정신없이 쌌던 짐을 풀고 나니 정말 이사했다는 실감이 든다. 떠나왔다는 느낌이다. 두고 왔다는 느낌이다.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두고 왔는데 다시 가지러 갈 수도 없는 느낌이다. 사방이 너무 조용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먹고 자던 집, 이제는 예전에 살던 집이라고 불러야 하는 집, 그 오래된 집을 아주 좋아했다. 수압이 너무 약해서 세면대는 거의 쓸 수 없고, 나무 바닥도 코팅이 자꾸 벗겨져서 청소할 때마다 짜증이 났으면서도 그랬다. 방이 너무 작아 세탁기를 놓을 곳도 없어 빨래방을 다녀야 해도 괜찮았다. 부엌에 나 있는 ㄱ자 모양 창으로 보이던 능선과 방 안을 온통 붉게 물들이던 노을이면 충분했다. 건물을 빽빽하게 둘러싼 나무로 가득한 정원을 지날 때마다 빠져 들었던 착각, 마치 여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그 착각마저 완벽했다. 그 집만이 주는 순진한 낭만이 나를 어느 정도 지켜줬다.
커다란 나무에 가려서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들도 있는지 잘 모르는 집, 거기서 세상 사람들은 있는지도 모르는 뉴스레터를 만들었다. 난생처음 정말 글만 쓰는 삶을 시작했다. 미래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글을 썼다. 편당 약 2,000자. 그 2,000자를 써보겠다고, 일주일을 다 썼다. 대단한 재능 같은 건 없는 내게 글은 시간으로 쓰는 것이었다. 그렇게 쓰며 살아간 1년 2개월이 집 곳곳에 먼지처럼 쌓여 있다. 타국에서 혼자 살기까지 했으니 그 집이야말로 유일한 목격자인 셈이다. 그저 철골과 시멘트일 수도 있지만, 만약 집도 듣고 보고 느끼고 기억할 수 있는 무언가라면, 그렇다면⋯.
가구 역시 단순한 나무 그 이상이라면, 할 말이 가장 많은 건 책상일 것이다. 한국에서 온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정리라고는 조금도 못 하는 사람이었다고 하겠지. 소재가 될지도 모른다고 여기저기 휘갈겨 써놓은 메모가 매일 널브러져 있고, 목차 구성한답시고 이런저런 제목을 적은 포스트잇을 미친 사람처럼 벽에 붙여댔다고. 온종일 앉아 키보드만 두들기다가 머리를 쥐어뜯거나 벌떡 일어나서 책상 주변을 왔다 갔다 해서 자기까지 정신이 사납더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마감일마다 불안해하던 그 여자를 진정시키는 소리가 하나 있었는데, 다들 기억하느냐고 되묻기도 하려나.
풀벌레 소리인 줄로만 알았던 찡쪽(집 도마뱀)의 울음소리. 한낮의 태양이 낮 시간을 흔적도 없이 녹여 버리고, 어느새 밤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집 안을 가득 메우던 소리. 밤은 진즉에 됐는데도 완성된 글은 없고, 마감이라는 걸 할 수는 있을까 의심이 부풀기 시작하면 그 소리를 들었다. 느리게 반복되는 울음소리를 가만히 듣다 보면, 왠지 모르게 나도 느릿느릿 타자를 칠 수 있었다. 그러다 타자가 빨라지고, 세상에 노트북 화면만 남은 것 같을 즈음, 어느새 글은 어딘가로 나아가 있었다. 갈 생각도 못 했던 곳, 있는지도 몰랐던 곳, 그런 곳에 가 있는 나를 발견하면 찡쪽 울음소리가 다시 천천히 커졌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종종 울고, 웃었다.
작가 대니 샤피로는 그의 책, <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 가장 많이 기억에 남은 건 내 작품이 <뉴요커> 폰트로 실린 걸 봤던 순간도 아니고, 아버지의 삽화를 봤을 때도 아니고, 이어지던 축하 전화와 메시지도 아니다. 해가 뜨기 전 새벽, 침실 책상 아래쪽 브로드웨이를 지나는 차들의 불빛과 어둠 속에서 빛나던 컴퓨터 화면이다.’
아마도 나는 커다란 베이지색 대리석에 짙은 색의 나무다리 4개가 달려 있던 책상과 그 책상에서 마주 보던 포스트잇 가득한 벽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찡쪽 울음소리, 어둠이 짙어질수록 서서히 커지던 그 소리, 느리게 느리게 울려 퍼지던 그 소리를 들으며 얼마나 자주 눈을 감았었는지.
안녕하세요,
늦어져서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려요. 저는 언제나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게 참 느린 사람입니다. 아마 저의 여름의 집, 오래된 책상, 그 모든 것을 보내는 일도 시간을 두고, 세월아 네월아하며 겨우 할 거예요. 그래도 이번만큼은 꼭 때맞춰 인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말도 표정도 없는 공간일 뿐이지만, 많이 고마웠다고요. 이사를 하는 와중에도 무리해서라도 연재를 한 것은 그 때문이었어요.
그 오래되고 불편한 집에 많은 빚을 지었습니다. 못난 모습을 많이 보였어요. 괴로워하고, 울고, 의심하고, 궁상도 많이 떨었거든요. 매일 어떻게든 용기를 쥐어 짜내고, 종종 기뻐하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다 지켜봐 준 것은 오직 그 단칸방뿐이고요.
거기서 지내는 동안, 정말 열심히 썼습니다. 누가 시키거나 해야 하는 일이 아닌데도, 혼자서 그렇게나 열심히 한 건 태어나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제가 이렇게 아무리 말해도, 그것을 정말 아는 것은 저와 여름의 집뿐일 거예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내내 잊지 못하겠지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치앙마이에서,
하니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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