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평양의 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봉봉 May 21. 2024

1. 인력거꾼 장봉진의 이야기

단편소설 <평양의 밤>

 쇼와 육년(1931) 칠월의 어느 여름밤. 봉진은 평양역 광장에 다른 인력거꾼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평소엔 정거장 인력거꾼의 등쌀에 발도 못 붙이는 곳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나만 빼고 연회를 하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봉진은 좀처럼 이 일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인력거꾼들은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 모를 신참에게 쌀쌀맞게 굴었고, 일이 서툴고 굼뜬 봉진은 그들의 조롱이나 빈정거림을 참기 어려웠다. 결국 봉진은 의도적으로 인력거꾼들이 많은 곳을 피했고 자연히 수입은 변변치 않았다. 다달이 버는 돈은 인력거 세를 간신히 낼 정도였다. 

 역사 문이 열리고 불빛과 함께 손님들이 쏟아져 나왔다. 봉진은 보따리를 머리에 인 아낙과 교복을 입고 비탈길을 터벅터벅 내려가는 학생을 지나쳐, 양 손 가득 짐을 들고 멍하니 서 있는 중년 신사에게 다가가 물었다. 

 “인력거 아니 타시랍쇼?”

 중년 신사는 의심쩍은 표정으로 봉진을 보더니 주변에 대안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서툰 일본어로 말했다. “동승루. 얼마?” “1원 50전.” 평소에 2~3배 되는 가격이었다. 봉진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일본말이 서툰 것을 보니 중국인 같았다. 시세를 아마 모르겠지. 신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흥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봉진은 혹시나 그가 취소할까봐 얼른 짐과 손님을 태운 후 달음질하기 시작했다. 지금 같은 시기에 중국인 손님을 태운다는 게 조금 꺼림칙했지만 값만 제대로 쳐준다면 못 태울 것도 없다 싶었다. 

 봉진은 선술집은 가봤지만 동승루 같이 고급 요리점은 한 번도 가본 적 없었다. 화려한 대화정(大和町) 거리를 서성거릴 때도 내부에 들어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양복쟁이에게 비굴하게 웃어 보이며 ‘나으리, 인력거 아니 타시랍쇼?’라고 물어보는 게 고작이었다. 이 중국인은 지금 막 평양에 도착한 듯싶은데 집에도 안 들리고 바로 요리점으로 가는 것을 보니, 모르긴 몰라도 요리점이란 꽤 좋은 곳이긴 한가 보았다.

 신시가지를 지나 내성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경찰들이 길목을 막고 있었다. 게다를 신고 무슨 일인지 구경 나온 일본인들 틈 사이를 헤쳐 지나가니 시내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는 게 보였다. 봉진은 열심히 검문하고 있는 순사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랍디까?”

 “시가지에서 사람들이 난동을 피운 모양이오.”

 “난동을 왜 피운 답니까?”

 “중국인들에 대한 복수겠지 뭐. 바쁜 거 안 보이오? 들어가려면 얼른 가시오.”

 순사는 검문도 대답도 건성이었다. 봉진은 다시 인력거를 끌고 조심스레 구시가지 쪽으로 들어갔다. 경찰들은 신시가지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은 열심히 검문했지만 반대로 조선인 신시가지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막진 않았다. 뒤에 태우고 있는 손님이 정말 중국인이라면 사지로 모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멈추면 약속받은 돈을 못 받을까 싶어 봉진은 조용히 인력거만 끌었다.

 내성 안은 완전 난장판이었다.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거리를 점령하고 우르르 몰려다니며 중국인이 운영하고 있는 가게에 들어가 물건들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경관들은 가끔 호각을 부르며 존재를 드러내긴 했지만 사람들의 돌팔매질에 감히 진입할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손에는 곤봉과 낫이 들려있었고 몇 개는 이미 사용된 것처럼 보였다. 바퀴에 물컹한 게 걸려 뭔가 하고 보니 피를 흘리며 쓰러진 중국인의 팔이었다. 손님이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다시 묻자, 봉진은 “지나인, 지나인(중국인, 중국인)”라고 말했다. 그러자 손님은 조용해졌다.  

 봉진은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길 바라며 조용히 인력거를 끌었다. 하지만 혼란한 거리에서 인력거를 끌고 있는 그의 모습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한 흥분한 사내는 봉진을 가로막고 그의 가슴팍을 몽둥이로 쿡쿡 찌르며 시비를 걸었다. 

 “돈이 그렇게 좋으슈?”

 봉진은 죄송하다고, 몰랐다고 말하며 계속 인력거를 끌었다. 뭐가 죄송한지는 그도 잘 몰랐다. 봉진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고 부끄러웠다. 얼른 이 손님을 내리고 이 대열에 합류해야 할 것 같았다. 만약 봉진이 이 사람 보고 내리라고 하면 이 중국인은 꼼짝 없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손님의 목숨이 봉진의 손끝에 달려 있었다. 그러자 봉진은 자신이 이렇게 힘들게 인력거를 끄는데 뒤의 손님은 편하게 앉아서 가는 것이 억울해졌다. 생각해보니 손님이 인력거를 끌고 자신이 뒤에 타야할 것 같았다. 

 어느 새 봉진은 동승루에 다다랐다. 그런데 거리에 동승루가 없었다. 위치는 분명 동승루인데 오색찬란한 간판, 밴드의 연주 소리, 술 취한 사람들의 웃음소리, 부엌에서 나는 자극적인 청요리 냄새는 모두 불타 사라지고 동승루였던 흔적만 재가 되어 남아있었다. 

 봉진은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중국인 보고 내리라고 했다. 중국인은 완강히 거부했다. 역 근처에 있는 철도호텔로 다시 데려가 달라는 것이다. 봉진은 그럼 돈을 두 배로 지불하라고 했고 중국인은 지금 현금이 없어 50전만 더 줄 수 있다고 했다. 

 “돈 없으면 내려야지.” 봉진은 중국인의 멱살을 잡고 그대로 거리에 내동댕이쳤다. 중국인은 봉진의 다리를 붙잡고 중국어로 뭐라 중얼거렸다. 아마 살려달라는 뜻이리라. 봉진은 다리를 거칠게 흔들어 그를 떼어냈다. 봉진이 양복쟁이들을 발로 찬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묘한 쾌감이 들었다. 봉진은 중국인의 짐을 거리에 내던지고 원래의 삯만 챙긴 채 다시 인력거를 끌기 시작했다.

 한 소년이 거리에 나앉아있는 중국인을 보고 봉진에게 다가와 물었다. “아저씨, 저 사람 되놈이에요?” 봉진은 뒤돌아봤다. 중국인은 불에 타 사라진 동승루 앞에 아이처럼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래 맞다. 되놈이다.” 봉진이 대답하자 소년은 목청을 가다듬더니 “되놈이다-!”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무리는 일제히 소년이 손으로 가리킨 곳을 향해 서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봉진은 뒤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인력거를 끌었다. 중국인의 비명소리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뒤에 손님이 없어 봉진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keyword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