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바르셀로나 4
야구보다는 축구를 좋아한다. 한 때 아주 잠깐 박주영이 좋아서 해외 경기들을 찾아보기까지 한 적도 있었다. 물론 팀 이름과 선수들의 이름을 외울 정도로 광팬은 아니다. 야구보다 축구가 좋은 이유는 단순했다. 경기의 흐름이 빨라서였다. 공을 던지고 치고 아웃을 기다리고 마침내 9회 말까지 끝나더라도 동점이라면 이후 계속되는 경기가 지루했다. 이에 반해 축구는 쉴 새 없이 눈알을 굴리며 공을 좇을 수 있어서 좋다. 야구보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분명 성격이 급하고 성질이 조금은 불 같은 사람일 것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니까 말이다.
계획에 없던 축구 경기를 본다는 것은 꽤 큰 지출이었다. 해외에서 사용 가능한 신용카드를 들고 오기는 했지만 워낙 철저하게 돈을 쓰는 내게 신용카드 사용은 ‘위급상황’을 뜻하는 것이었다. 매일매일 내가 쓴 유로가 얼마나 되는지, 물건을 사고 식사를 할 때마다 휴대폰에 기록을 하는 사람이니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돈에 대해 얼마나 철저한 사람인지 알 것이다. 가끔은 이런 나 자신이 미울 때도 있다. 성격을 버리지 못하고 여행지에서도 돈에 얽매여 시간을 보내는 것만 같아 아쉬울 때가 많았다. 결국에는 모든 것이 돈이라는 건데, 불필요한 지출을 막는 것은 좋지만 신경 쓰다가 정말 아름다운 무언가를 놓칠까 겁이 나기도 했다. 축구 경기 예매에는 예상치 못한 조력자가 있었다. 게다가 하필 대단한 팀에 대단한 선수의 출전 경기였다. 그는 메시였다.
축구 하면 단연 FC 바르셀로나 팀이고 또 메시 아니겠는가. 햇빛 쨍쨍한 스타디움에 녹색 구장만을 바라보고 있자니 머리가 아찔해왔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메시의 등 번호를 보려고 좋지 않은 시력에 두 눈을 부릅뜨기도 하고 골문을 향해 달려가는 선수를 따라 골을 외치며 목에 핏대를 세우기도 했다. 외국인들 눈에 젊은 아시아 여자의 광기 어린 관람 방식이 생소하고 또 조금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지나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이지 한국이 아닌 곳에서 나는 내가 아니게 된다. 분명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을 텐데 한국에서는 안면도 없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온통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외국에서는 달랐다. 물론 요즘에는 어딜 가나 한국 사람들이 많지만 현지 사람들에게 나는 그저 익숙치 않은 수많은 이방인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런 생각에 나를 많이 내려놓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여행지에서는 늘 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 이끌어낸 새로운 나의 모습은 늘 마음에 들었다.
여행은 어쩌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하나의 매개가 되기도 하지만, 그 중에서도 평상시에는 결코 만날 수 없던 내 깊은 곳에 숨어져 있는 내면의 나를 만나는 수단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목이 쉬었다. 혼자 다니는 여행에서 말을 해봐야 얼마나 많은 말을 한다고. 아주 간간이 식당에서 그리고 상점에서 주문을 하고 물건을 살 때나 입을 여는데도, 쉬어 버린 내 목소리가 걸걸하니 조금 거슬렸다. 물론 그들에게는 내 목소리가 어떻든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이다. 고작 며칠 머무는 이방인의 목소리 따위 걸쭉하니 남자 같아도, 담배를 잔뜩 피워댄 골초 같더라도, 아무래도 그들은 신경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파리에서 달고 와 버린 감기에도 아랑곳 않고 축구 광팬이 되어 소리친 탓에 그만, 중저음의 멋진 목소리를 가진 사람을 한 명 더 만나게 되었다. 우습게도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진 내가 너무 마음에 들어 버렸다. 아마 로마를 지나 집을 돌아가는 길에도 이 친구의 목소리를 계속 듣겠지. 그러나 호텔로 돌아가는 길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졌다. 수많은 관중과 감정을 숨김 없이 드러내며 경기를 관람하던 몇 분 전의 나의 모습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언제나 군중이 모인 곳은 왁자지껄하고 시끄럽다는 생각이 들어 싫어했었는데, 경기장에 울려 퍼지는 함성은 결코 소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함성이 진심이 될 때는 다름 아닌 내가 그들과 한마음일 때라는 것을 말이다.
스포츠라면 인종도 나이도 성별도 관계 없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적과 아군을 구분 짓는 어쩌면 가장 명확하고 깔끔한 기준이기도 하겠지만, 같은 경기를 보며 한마음으로 한 목소리를 내는 이 순간만큼은 그냥 스포츠를 사랑하는 친구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 모든 경기는 페어플레이여만 한다는 것을 잊지 않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