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짧은 인생,
참으로 눈물겨워 잊을 수 없었다.

도도한 파리9

by 리아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갈 때 즈음 나는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은 예술에 흠뻑 빠져 있었다.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기 시작했고 작품을 모두 찾아 보았으며 심지어는 그들의 인생에까지 발을 들여 놓곤 했다.

좋아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처음에는 어떤 하나의 것에 매료되어 좋아하기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나조차도 모르는 새에그 사람 혹은 그 무언가의 전부에 물들어 가는 것. 그것이 ‘좋아한다’는 것의 짙은 의미였다.

조예가 깊지 않다고 말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고 그렇게 좋아하는 글쓰기도 전문가의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의 차이를 깨닫게 되면 그 때에는 비로소 꿈을 접을 만한 배포마저 생기는 것 같았다. 나는 그림을 좋아했지만 그림을 그리지 않았고, 그나마 글은 내가 꾸준히 잡고 있던 단 하나의 꿈이자 희망이었다.

그의 인생에 관여할 수 있었다면 나는 어쩌면 그의 뮤즈라도 되려 했을 것이다. 혹 동시대의 사람이었다면 테오 대신 그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냈을 지도 모른다. 그에게 그림이 유일의 낙이었듯 나에게는 이렇다 할 재주가 없고 말보다는 글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동생에게 그리고 다른 동료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낸 데에는 그림 뿐 아니라 글쓰기에도 분명 소질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실로 그러했다. 그가 남긴 편지를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그의 인생과도 같이그의 편지는 결코 밝은 면이 없었다. 안타깝다 못해 심지어는 화가 나려고까지 했다. 그는 괴로워했고 늘 우울했으며 자신의 불투명한 미래를 꾸준히 비추어 주려 하는 동생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과 형도 아니고 동생에게 신세를 지면서도 그림을 놓지 못하는 것은 그의 인생 전부를 우울의 늪으로 빠지게 만들기 충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빈센트 반 고흐였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찾으려 한 이유는 이토록 다름 아닌 고흐 때문이었다. 그의 인생 전부를 다 알지는 못했을 무렵이었지만, 나는 단순히 그의 무덤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파리에서 2시간이 더 걸리는 그 곳을 하루 만에 다녀올 계획이었다. 기차가 잘 되어 있어 큰 번거로움은 없었다. 중간에 한 번 환승을 하며 조금 헤매긴 했지만 나름 순탄한 근교 여행의 시작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프랑스의 날씨는 변덕이심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때문에 한참을 역사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만 있었다. 파리에서의 출발이 늦지는 않았지만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도착하였을 때는 마침 점심을 먹을 때였다. 여행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식사였으므로, 나는 검색을 시작했고 조금만 가면 된다는 웹 상의 누군가의 말을 믿고 빗 속을 뚫고 식당으로 달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식당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쏟아지는 비 탓에 지체할 시간이 없어 근처 다른 식당으로 들어갔다. 분위기도 식사도 모두 나쁘지 않았다. 낯선 동양인을 바라보는 시선도 여유 있게 즐길 수 있었다. 카페에 앉아 비 오는 파리를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사실, 어딘가 스산하기까지 했다. 먹구름으로 가득했던 고흐의 마지막 삶이 이곳의 공기를 채우는 것만 같았다.

이토록 변덕스러운 날씨라면 평범한 누군가도 조울증에 빠지기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흐가 말년을 이곳에서 보낸 것은 인생의 작은 실수가 아닐까. 그가 이곳이 아니라 빛이 가득한 남프랑스에서 살았더라면 그는 어쩌면 보다 오래 살며 그의 작품이 재조명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눈을 감았을지도 모르겠다. 크지 않은 동네라 이곳 저곳 천천히 돌아다니다 보니 서서히 날이 개고 있었다. 금세 해가 들었다. 동네는 매우 한적했다. 겨울이라 그러했겠지만 사람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빛은 들기 시작했지만 죽음이 내려앉은 작은 동네처럼 느껴졌다. 고흐의 마지막이 담긴 집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그의 죽음을 지켜본 닥터 가셰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의 영혼이라도 기리기 위해 작은 성당엘 들어갔다. 나는 성당을 좋아했다. 특히나 유럽의 성당은 더욱 마음이 갔다.

무신론자이지만 어딘가 내 마음이 허할 때에는 성당이 제격이었다. 방문객들을 위한 방명록이 있었다. 감히, 고흐의 영혼을 잘 느끼고 간다고 적어 내렸다. 성당을 나오며, 건방진 생각이었지만, 그의 일생을 닮고 싶어졌다.

무덤을 찾아가는 길은 탁 트인 길이었다. 허나 비에 젖어 촉촉하다 못해 축축해져 버린 길은 신고 간 로퍼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진흙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이에 비하면, 동네에 깔린 아스팔트와 곳곳에 ‘VINCENT’라고적힌 동그란 금속판이 꽤나 예쁘고 좋았던 것이었다. ‘빈센트 나침반’이라고 몰래 이름 지어 나의 발과 함께 사진으로 남긴 그것이었다. 이 작지도 크지도 않은 동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고흐를 떠올리며 천천히 보물찾기 하듯 찾아볼 수 있는 작은 재미였다. 그것들을 모두 지나니 무덤으로 향하는 길은 비포장도로였고 마침내 저 멀리 반쯤 열린 철문이 보였다. 알 수 없는 새들만 대지에 닿을 듯 날아다니고 있었고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겨우 발견한 한 남자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묘지이겠거니 하여 조심스럽게 따라 들어갔다.

넓었다. 우리나라처럼 봉긋한 무덤으로 가득한 묘지였다면 어딘가 더 으스스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곳 저곳에 묘비가 솟아 있었고 언제 왔다 갔는지 알 수 없는 각양각색의 꽃다발이 묘비에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마을에 도착하였을 때와 달리 등골이 조금 서늘하여 열심히 고흐의 무덤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검색을 했고 휴대폰 사진 속 무덤의 모습과 이곳을 비교하며 다시 열심히 눈을 굴렸다. 그리고 마침내, 묘지 한쪽 벽면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고흐와 테오의 묘비가 보였다. 고흐의 묘비 앞에는 노란 꽃이, 테오의 묘비앞에는 보랏빛의 꽃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묘비를 둘러 싼 담쟁이 넝쿨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다른 묘에 비해 보다 풍성하고 애정이 느껴지는 듯 했다. 마을의 묘지라 하니 이곳에 누워있는 사람들은 어쩌면 그와 동시대에 살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그의 길을 고스란히 밟으며 이곳에서 잠들면 어떠할까. 짧은 묵념과 함께 이후 예술가로서의 내 인생도 떠올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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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10일, 예쁜 금속판을 따라가니 마침내 마주할 수있던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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