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참, 블라디보스톡 같군요.

다채로움을 품은 블라디보스톡 1

by 리아

가을에 태어난 사람은 더위도 추위도 잘 타지 않을 줄 알았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그저 먹을 것만 풍부할 줄 알았다. 나는 가을 어느 한 조각을 품고 태어난 아이였고, 예민하게도 혹은 조금은 불행하게도 더위와 추위를 모두 탔다. 사계절을 모두 품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는 문득, 다가오는 겨울에 대비하여 짧고 강한 겨울을 먼저 경험하고 와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물론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예방 주사와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미리 작게나마 그것을 경험하는 꼴이라니. 누군가 이런 나의 선택을 듣는다면 미련하다고 웃을지도 몰랐다. 걱정을 덜어내고 마음 한 가득 설렘만 담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주섬주섬 방한 용품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요즘 또 다시 숨 가쁘게 녹아버리는 마음을 꽁꽁 얼려야만 하는 이유도 존재했다. 나는 그렇게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꽤 가까운 거리였다. 마침 대낮의 비행이었기에 금요일까지 쌓인 피로를 내려 놓으며 깜박 졸고 일어나니 하얗게 서리가 낀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했다. 시차로 인해 이곳은 곧 어둠이 깔릴 것만 같았다. 겨울은 언제나처럼 달의 시간이 빨리 오려 했다. 해가 기울기 전에 낯선 공항을 뜨고 싶었다. 아니, 어서 빨리 블라디보스톡의 그 푸른 경쾌함을 느끼고 싶었다. 택시를 불렀고 영어가 하나도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의 첫 러시아인과의 동승이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였다면 나는꽤 수다스러운 내 본 모습을 택시를 타자마자 부터 보였을 것이었다. 그러나 유명했던 소문만큼, 제멋대로 수염을 기른 러시아 택시 아저씨는 무뚝뚝한 얼굴로 열심히 악셀만 밟았다. 잠깐의 쉼도 없었다. 시내로 진입하기 이전까지 그는 정말이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 흔한 ‘백미러로 손님 동태살피기’ 조차 없었다. 이토록 무관심한 사람이 있을 줄이야. 어쩌면 러시아 인들은 매서운 추위에 마음까지도 얼어 버린 것이 아닐까 의심을 품어 버렸다. 그래, 어쩌면 정말로 추운 곳에 사는 사람들이라 심장이 다른 곳의 사람들보다 아주 조금은 딱딱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참을 달리는데 성에가 잔뜩 낀 창문 사이로 일몰이 보였다. 차라리 나는 영어로라도 양해를 구하고 창문을 살짝 내려 노을을 보았어야 했다. 물론 군데 군데 얼어버린 창문 너머로 노을의 빛이 들어오는 것이 꽤나 낭만적이기까지 했지만 말이다. 그 칼바람을, 심장까지도 꽁꽁 얼려버릴 것만 같은 러시아의 한파를 달리는 차 안에서 느끼기가 어디 쉽겠는가. 무모한 생각이지만, 비록 그리 하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한 번 쯤은 맨 얼굴로 블라디보스톡을 마주해 보아도 좋았을 것 같다. 원래 있는 그대로 맞이해 보아야 진짜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법 아닌가.

블라디보스톡 시내로 들어서니 달리던 택시 역시 이제야 조금 숨을 돌릴 틈이 생겼다. 살짝 긴장하고 있던 나 역시 다양한 차종이 신호에 걸려 멈추어 있는 도로를 보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늘 낯선 곳에 처음 도착하면 느끼는 일종의 가벼운 강박증세였다. 운행 내내 눈길을 한 번 주지 않던 덥수룩한 수염의 택시 기사 아저씨는 친절하게도 나의 캐리어를 트렁크에서 꺼내주며 정말이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러시아 인들은 어딘가 츤데레 같다’는 말이 뇌리를 스쳤다. 이 추운 곳에 떨어지자마자 만난 첫 현지인에게 그들의 본성 아닌 본성을 바로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러시아를 아주 제대로 접한 기분이 들었다. 단 한 마디, 흡사 발음이 욕과 비슷하여 혼자 연습하면서도 웃음을 참을 수 없던, 고맙다는 말을 러시아 말로 내뱉었다. 유심 칩을 구매하며 썼던 영어와 달리 러시아에서 쓴 첫 외국어였다. 한국에서 혼자 연습할 때와는 참 많이 다른 언어처럼 들렸다. 늘 자주 사용하는 영어는 이따금씩 잘 말하지 못하는 모국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나의 입술을 타고 부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현지 언어는 꽤나 신선했다.

내가 생각하고 또 말을 전하고도 우스웠던 것이 있다. 여느 남자들이 접하는 야한 동영상, 누구나 쉽게 말하는 그 야동이라는 것에 대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한 때에는 일본이 좋았으나 요즘은 러시아가 대세라는 말이었다. 유독 러시아에 미녀가 많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역시나 돌아보면 작은 얼굴에 큰 키를 가진 아름다운 러시아 여자들이 끊임없이 눈에 띄었다. 사람에 대한 기대는 크게 하지 않고 떠난 곳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냥 단순하게 예쁘다는 생각만 했다. 그러나 방심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전에 내가 잡은 숙소에서 체크인을 하며 마주친 호스텔의 스텝을 보고 나는 러시아는그냥 ‘미남 미녀가 많은 나라’로 단정짓고야 말았다. 훤칠한 키에 작고 잘생긴 얼굴, 거기에 다부진 몸까지 소유한 이 젊은 러시아 스텝은 나의 혼을 쏙 빼놓기에 충분했다. 비록 호스텔 스텝임에도 영어를 잘 하지 못해 의사소통은 미소로 이어갔지만 말이다. 이틀 째에는 비로소 전하고 싶던 말을 술기운을 빌려 그들처럼 무심한 듯 시크하게 툭, 내뱉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어딜 가나 언제나 술은 대단한 마법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20171118_173134.jpg 2017년 11월 18일, 블라디보스톡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어느 도로 위에서.

러시아도 유럽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 광고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이라고 가리켰기에 사람들은 유럽이라고 생각할 것 같다. 유럽이면 어떠하고 또 아시아의 일부면 어떠한가. 혹은 유라시아 대륙이라 불리니 그 또한 괜찮다. 어디에 속하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모자를 써도 뇌가 시릴 정도로 춥지만 아름다운 나라임은 틀림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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